2016. 02. 25. Thursday, Genesis 38:11

2016. 02. 25. Thursday

Genesis 38:11
And Judah said to his daughter-in-law Tamar, "Live as a widow in your father's house until my son Shelah is grown." For he said, "Lest he also die like his brothers." And Tamar went and lived in her father's house.     


유다는 자기 며느리 다말 때문에 자기 아들 엘과 오난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셋째 아들 셀라를 보호하기 위해 그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 보낸다.

그런데 문제의 원인은 며느리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엘과 오난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며느리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친정으로 돌려 보낸다.

이렇게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고 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정말로 유다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원했다면 그는 가장으로서 자기의 가정 환경과 가정 교육을 돌아보고 (자기 아내와 함께) 가정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았어야 했다.

그리고 엘과 오난을 죽인 것은 다말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담판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 앞에서 풀어야 할 것을 사람들 사이에서 해결하려고 분주하게 사람들을 찾아 다니거나 품어야 할 다말과 같은 사람을 (마음의 불편함과 어려운 상황 때문에) 보내어 버리지는 않는가?


진 짜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고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을 때가 많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눈에 있는 티를 탓하기 전에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처리해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에 있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유다는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고 당황하기도 했겠지만 자기 아들을 통해 드러난 사악함 때문에 가정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낸 것은 아닐까?

체면을 지키는 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한국이나 중동의 문화 속에서는 거짓된 이미지로 포장하고 덮거나 심지어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개종한 자녀를 집에서 내쫓거나 죽이기도 한다.

나중에 다말이 가진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유다는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 사실을 부인하고 다말과 태중의 아이를 돌로 쳐서 죽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겸손히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다말이 옳았음을 인정한다.

나는 나의 체면을 내려놓고 겸손히 나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을까?

유다가 처음에 다말을 그녀의 아버지 집에서 취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올 때는 "신부(bride)"였지만, 지금 두 아들이 죽고 난 뒤 그녀는 "과부(widow)"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히 브리어에서 "신부"라는 말은 "며느리"라는 말과 같은 단어인 "칼라(כּלּה = a bride, daughter-in-law)"로 "신부" 또는 "며느리"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 뿌리가 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칼랄(כּלל = to complete, to make perfect)"이라는 말로 "완성하다" "완전케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런데 "과부"라는 단어는 "알마나(אלמנה = widow, a desolate place or house)"라는 말로 "과부" "폐허가 된 장소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유다가 자기 아들의 신부이며 자기의 며느리인 다말을 처음 데리고 왔을 때는 완벽한 사람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자인 엘이 죽으면서 그녀는 과부가 되고 차남인 오난이 죽으면서 두 번이나 과부가 되어버린, 다말의 완전해 보이고 완벽해 보이던 그 인생은 폐허(=과부)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다말이 자기 인생을 폐허(=과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단지 유다의 두 아들 때문에 과부(=폐허)가 된 것이다.

유다는 이렇게 폐허(=과부)가 된 다말을 친정 아버지 집으로 보내며 유다의 셋째 아들인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즉 셀라가 장성하면 과부의 신분을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셀라를 자기에게 주지 않고 자신은 여전히 황폐한 채 버려져 있던 다말은 "셀라(שׁלה = request)"를 달라고 요청하는 대신 창녀로 가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한다.

왜 다말은 유다에게 정당하게 "셀라(שׁלה = request)"를 요청(שׁאל = to enquire, to request)하지 않고 이런 이상한 방법을 취했을까?

l그녀는 이미 폐허가 된 자신의 인생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유다의 인생도 폐허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유다는 다말을 과부로 만들지 않고 셀라의 신부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셀라를 살리고 자기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다말을 과부로 만들기로 결정했고 (듣기 좋은 말로)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만 기다리라고 했다.

유 다는 자기 가문이 마지막 남은 아들인 셀라를 통해 이어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다말의 죽음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남편으로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다의 가문은 셀라가 아닌 유다 자신을 통해 다말로 말미암아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나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하고 도망가고 피해가는 그 사람이나 그 상황을 통해 이루어 질 때가 많다.

그 러므로 부딪혀야 할 것은 부딪혀야 하며 주고 보내야 할 것은 보내고 취할 것은 (십자가라고 해도)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피해가거나 엉뚱한 것을 움켜쥐고 있으면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데서 엉뚱한 모습으로 다말을 만나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유다는 셀라가 자라면 다말에게 남편으로 주겠다고 말을 했지만 그것은 셀라를 보호하기 위한 빈말이고 거짓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말에게 남편으로 주지 않았고 그로인해 다말의 복수극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겠다고 기도했고 그녀는 그 기도대로 사무엘이 젖을 떼고 이유식을 끝낸 뒤 실로에 있는 대제사장 엘리에게로 보낸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기도는 공기만 진동시키는 빈소리이며 거짓말일 뿐이다. 결국은 그러한 거짓의 열매는 내가 뿌린대로 내가 거두게 된다.


두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