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15. Monday, Genesis 38:2

 

2016. 02. 15. Monday

Genesis 38:2
And Judah saw there a daughter of a Canaanite man named Shuah. And he took her, and went in to her. 


유다가 헤브론을 떠나 내려가다가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간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다는 히라의 딸을 보고 히라의 딸을 아내로 취하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이다.

그런데 유다는 히라의 딸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보고(ראה = to see) 그녀를 아내로 취한다.

히라에게 딸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히라의 딸이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히라의 딸보다 수아의 딸이 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까?

이유야 어쨌든지 "히라"로부터 시작한 우리의 여정도 "히라의 딸"로 끝나지 않고 엉뚱하게 전혀 그림에 없었던 "수아의 딸"을 보고 그녀를 취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있다.


히라(=splendor)는 그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귀족 같고 영화로운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그 딸도 멋있게 꾸미고 다니지 않았을까?

유다는 아무 것도 없는 목자였기에 히라의 딸을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거나, 아니면 수아의 딸에게로 마음이 더 끌렸기 때문에 그녀를 취한 것일 수도 있다.


유다는 증조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그의 종을 밧단아람까지 보낸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삼촌 에서가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취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다는 심각한 고민없이(?), 아버지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일까? 그것도 히라의 딸이 아니라 수아의 딸을 취한 것일까?

유 다가 수아의 딸을 "보고(ראה)" 그녀를 취했다는 것은 하몰의 아들 세겜이 디나를 보고(ראה) 강간했던 것처럼 내면의 성품이나 정말로 그녀를 알고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뭔가 첫 눈에 끌리는 매력 때문에, 달리 말하면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충동이나 필요 때문에 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Genesis 34:2
And Shechem the son of Hamor the Hivite, the prince of the land, saw her, and took her, and lay with her, and humiliated her. 


눈은 우리를 쉽게 속인다.

기 브온 족속은 다 떨어진 옷과 말라 비틀어진 포도주 가죽부대와 곰팡이 난 빵을 보여 주면서 그들이 먼 거리에서 왔으며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했을 때,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들이 보고 들은 것 때문에 기브온 족속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Joshua 9:14
And the men took of their provision, and did not ask at the mouth of Jehovah.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그 나무 열매를 보자 먹음직하고 보암직 하며 지혜롭게 할민큼 탐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뱀이 말한대로 그 열매를 따 먹고 말았다.

Genesis 3:6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the tree was desirable to make one wise. And she took of its fruit and ate; and she also gave to her husband with her, and he ate. 

그러면 유다가 첫 눈에 보고 반한 수아의 딸이 가졌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수아의 딸은 유다가 찾고 있었던 뭔가를 쉽게 즉석에서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취하고 그녀에게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이것은 유다가 자기 아내의 죽음 후에 친구 히라와 함께 양털을 깍으러 딤나로 가는 길에 기생처럼 가장한 며느리 다말에게로 들어간 것을 보면 유다의 감정과 육체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파는데 앞장 섰던 유다는 요셉을 잃고 비통해 하는 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너무나 힘들어 그 죄를 계속 생각나게 하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감정적으로 유다는 내면에서부터 죄책감으로 부르짖고 있었을 것이며 뭔가 위로와 안정을 필요로 했거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수아가 나타났고 그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녀를 본 유다는 첫 눈에 보고 반하게(?) 된다.

수아(שׁוּע = halloo)라는 이름은 "샤바(שׁוע = to be free, to halloo, to cry)"라는 동사에서 왔고 "자유케 하다" " 부르짖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수아도 뭔가 감정적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자유를 갈구하며 내면에서부터 부르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유다는 비록 감정적으로 끌리고 뭔가 서로를 이해해 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어도 수아가 가나안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처음부터 그 딸과 결혼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결혼을 했고 세 아들을 낳았으며 그들 중 두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악함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유다의 인생은 비참하게 끝나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창녀로 가장한 며느리와 잠자리를 함께 해서 두 아들(손자?)을 얻게 되고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정말로 유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야 했다.

그런데 유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다가 행한 실수나 실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 행한 순종 때문에 모든 것을 씻고 덮고 새롭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유다의 후손으로, 가나안 여인의 피가 섞이고 모압 여인의 피가 섞인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것도 자기 아버지와의 근친상간으로 피가 혼탁해진 롯(Lot)의 후손인 모압 여인 룻을 통해 오셨고 시아버지와의 근친상간으로 피가 더러워진 가나안 여인 다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더럽고 소망없어 보이는 짓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소망이 있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자.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인 믿음으로 사는 것을 더 연습하자! 마약을 하는 친구인 리차드를 보면 소망이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 안에 소망을 둔다.

Hebrews 11:1
Now faith is the substantiation of things having been hoped, the evidence of things not having been s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