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05. Friday, Genesis 37:30 (presence to absence)
2016.02. 05. Friday
Genesis 37:30
And he returned to his brothers and said, The child, he is not. And I, where shall I go?
르우벤이 찢어진 옷을 걸치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그의 동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났다.
르우벤의 동생들은 왜 그의 옷이 찢어지고 그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는지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르우벤에게 자기들이 요셉을 팔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숨겼다.
르우벤은 요셉을 웅덩이에 던져 넣은 뒤, 아마도 양을 먹이러 다른 곳으로 갔든지 다른 일 때문에 어디를 갔든지 이스마엘 상인들이 나타나 요셉을 사 갈 때 거기에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돌아오는 길에 요셉이 아직도 그 웅덩이에 있는 줄 알고 그를 구하려고 갔다가 요셉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만약 르우벤이 자기 동생들과 함께 있었다면 유다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자고 했을 때 르우벤은 결사 반대했을 것이고 요셉은 그렇게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결국은 르우벤이 그 자리에 있고 없고를 떠나서, 형제들이 요셉을 팔고 안팔고를 떠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르우벤의 부재(absence)는 가나안 땅에 요셉의 부재(absence)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르우벤의 부재(absence) 가운데 그의 형제들은 이스마엘 상인들의 임재(presence)를 허락했고 은전 20개가 그들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르우벤의 부재로 말미암아 동생을 팔았다는 죄책감(guilty)과 아버지와 르우벤에게 말하고 보여준 거짓들(lies)이 그들 안에 들어와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르우벤의 부재"로 말미암아 비록 노예의 신분이기는 했으나 이집트 땅에 "요셉의 임재"가 나타났고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르우벤의 부재는 이집트 땅에 하나님의 임재와 요셉의 임재를 갖고 왔고 하나님 나라의 임재, 즉 구체적인 형태인 이스라엘이 나라로 형성되고 태어나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
만약 르우벤이 그의 부재를 만들지 않고 요셉을 구해서 아버지께로 데리고 갔다면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아버지께 고자질 했을 것이고 야곱 집안은 풍지박살 나고 말았을 것이다.
때로는 나의 임재보다 나의 부재를 통해서 하나님은 더 놀랍고 많은 일들을 행하신다.
나는 이전에 마치 내가 꼭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해야만 된다고 생각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즉 내가 없으면 일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내가 있음을 통해서 일을 막거나 망치게 되고 사람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막고 그들을 망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해 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며 사람들을 자라게 하시고 그들을 세워 가는 것을 본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신뢰하지 못하면 나의 부재를 허락할 수 없고 나의 임재를 만들기 위해 발악하며 몸부림 치고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omnipresent)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나의 임재가 가득하면 곧 거기에는 하나님의 부재가 형성되게 되며, 반대로 나의 부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게 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당신의 부재를 만드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10일 후에 성령을 보내셨다.
충분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서 오히려 자라고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과 계속해서 함께 계셨다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뒤 종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기탄없이 그들 앞에서 말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부재 상황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임재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즉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변화가 강의실 안에서의 교육이나 훈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삶 가운데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임을 인식하게 된다. (행 4:13)
Acts 4:13
But seeing the boldness of Peter and John, and having perceived that they are untaught and uneducated men, they marveled. And they recognized them, that they were with Jesus.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과는 반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제자 훈련도 하고 교육도 하며 그 분의 임재처럼 느껴지는 종교적이고 감정적인 분위기도 연출하지만 정작 그 수련회나 컨퍼런스가 끝나고 예배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신실하게 변화되지 않은 이전의 모습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부재를 만드는 것을 두려워 하고 가능한 많은 영역에서 자신들의 임재를 만들고 컨트롤 하며 분주하게 살아간다.
예수님은 삶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삶 속에서 그들을 훈련하셨다. 삶이 빠져버리면 결국은 지식과 껍데기 밖에 없는 허수아비가 된다.
이런 허수아비 신앙은 이름과 껍데기는 멋있고 웅장할지 모르지만 결코 핍박과 죽음 앞에 담대히 설 수도 없고 현실과 타협하고 자신의 자리와 임재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의 임재를 없애며 살아갈 것이다.
지난 해 크리스마가 지나고 나서 잉글랜드에 있는 장모님 댁에 갔다가 일주일 후 웨일즈에 다시 돌아왔을 때 유딧이라는 에라토리안 자매가 반갑운 얼굴로 나를 맞으면서 "규대, 네 말이 맞았어. 너의 부재 가운데 내가 자라고 있어!(Qday, you are right. I am growing in your absence!)"라고 소리치듯 고백했다.
정말로 그 자매는 영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인 부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변화를 보이며 자라고 있다.
지난 더포지 스쿨 이후에 나는 이 공동체에서 더 많은 나의 부재 만들기를 연습하고 있다. 쉽지는 않았지만 나의 부재 만들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면 나는 나의 임재를 만들기에 급급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정말로 신뢰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신뢰한다면 나는 애를 써서 나의 부재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안식일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당신의 부재이다. 하나님은 이 날 마치 당신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모든 것을 멈추시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누리게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임재를 직장이나 사역 속에 드러내기 위해 일하고 돈 버는데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래서 일과 돈으로, 직위와 사역으로 자신의 임재를 더욱더 부각시키며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임재가 지나치면 마치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 분의 임재뿐 아니라 아예 그 분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혼란의 바벨을 쌓아 올라간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 없이도 얼마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다. 아니, 내가 없어져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더 쉽게 하실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에 걸림돌 같은 나를 부르셨을까?
하나님은 걸림돌 같은 나를 잘 다듬어 디딤돌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이미 완성된 당신의 여정에 나를 끼워주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으며 부활 후에 이 땅에서 하늘로 부르시고 이 땅에 당신의 부재를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임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나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정말 주님의 임재를 추구한다면 나의 부재를 기꺼이 받아 들이고 그 부재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