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01. Monday, Genesis 37:26

 2016. 02. 01. Monday

Genesis 37:26
And Judah said to his brothers, "What gain is it that we kill our brother and conceal his blood?"   


유다는 이스마엘 상인들을 보자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지 말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유다의 제안대로 그들은 요셉을 그 웅덩이에서 끌어내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 넘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쌓인 감정 때문에 요셉을 죽이는데만 혈안이 되어 이스마엘 상인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을 그냥 보내고 만다.

즉 그들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들 안에 있는 미움과 질투의 감정 때문에 이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요셉의 형들은 르우벤의 설득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직접 요셉을 죽이기로 음모했던 원래 계획에서 한걸음 물러나 스스로 죽게 하는데 동의하고 그를 웅덩이에서 던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스마엘 상인들을 본 유다가 형제들을 설득해서 그냥 요셉을 죽게하지 말고 그를 노예로 팔아서 뭔가를 챙기자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형들은 그를 죽이려던 계획에서 또 한걸음 물러나 은 20개를 받고 그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 버린다.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요셉을 죽이지 않았기에 (마음으로는) 그를 죽인 것보다 죄책감을 덜 갖게 되었고 실제적으로는 돈을 벌개 되어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원래 그들이 갖고 있던 미움과 질투에서 나온 "요셉 살해 계획"은 변경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실패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의 감정에서 나온 계획이 상황이나 사람들의 설득 때문에 바뀌고 결국은 실패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성취된다.


내가 세우는 계획은 감정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계획은 상황이나 사람에 의해 설득 당하고 실패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세워진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세워진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나의 감정이나 상황을 기꺼이 내려 놓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을 위해서 르우벤의 설득과 이스마엘 상인들의 등장과 함께 유다의 제안이 필요하다.

요셉의 형들은 그 돈 몇 푼을 얻기 위해서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원래 계획이 실패하는 길로 들어섰다.

나도 몇 푼의 돈 때문에 원래 하나님이 내 마음에 넣어 주신 그 계획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영국 비자의 어려움 때문에 원래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넣어 주신 그 계획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통해서 뭔가를 얻기 위해 이 음모를 꾸미고 요셉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없애버림으로써 요셉 때문에 그들 안에 생긴 미움과 질투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미움과 질투는 밖에 있는 요셉을 없앤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속에 있는 문제는 속에 있는 것을 해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밖에 있는 요셉을 없애더라도 그들 안에 뿌리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즉 요셉은 그들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미움과 질투를 격동시킨 것 뿐이지 요셉이 뿌린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속에 있는 낮은 자존감을 해결해 보려고 밖에 있는 온갖 것(소유)들을 모우고 늘리거나 심지어 자기 몸에 칼이나 대패를 갖다대고 자르고 깍아가며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 본다.

그런데 속에 있는 것은 속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깊은 고통과 혼란, 미움과 질투 가운데 자신을 죽이거나 남을 죽이게 될 것이다.


몇 일전 아내가 읽은 글 하나를 나누었다. 어떤 미국인 남자가 너무나 여자가 되고 싶어서 성전환 수술을 했고 육체적으로는 여자처럼 되었지만 자신의 내면에 있는 남자라는 인격과 정체성(personality, identity)은 여전히 남자로 남아 있어서 갈등을 거듭하다가 결국 다시 남자로 살기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나누면서 성전환 수술을 한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하면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수술을 했지만 오히려 몸과 마음이 전혀 다른 인간(personality)의 반응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혼돈과 갈등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했다.


예수님을 찾아 왔던 청년 부자 관원은 겉으로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영생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다.

즉 그가 가진 엄청난 소유나 직위, 청년의 젊음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결국은 밖에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속의 갈망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깊은 영혼의 갈망을 얄팎한 돈이나 지위, 권력이나 명예로 대체해 버리지 않는가?

나는 내가 받았던 아버지의 말씀대로 세겜에 왔으나 형들을 발견치 못했기에 이름없는 사람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헤브론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는가?

나는 르우벤이나 유다의 설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내 안에 쌓여온 요셉에 대한 감정 때문에 그를 쳐서 죽이려고 돌을 들고 있지는 않는가?

감정은 계산하지 않고 행동한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을 하고 계산을 하게 되면 감정적으로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믿음도 감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즉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은 계산하지 않고 행동한다.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먼저 따져보고 계산하게 되며 결국은 믿음이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망대를 세우는 사람이 그것을 세우는데 충분한 재정이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보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은 건축 비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이 치러야 할 댓가에 대한 것이다. (눅 14:28)

Luke 14:28
For who of you desiring to build a tower does not first sit down and count the cost, whether he has the things to finish;  

즉 나에게 그 분을 신뢰하고 끝까지 따를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은 감정 때문에 할 수 있겠지만 중간에 포기하게 되며 사람들의 웃음꺼리가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이 감정적인 충동으로 시작을 하지만 어려움이 오고 상황이 풀리지 않으면 그 뜨거웠던 감정은 사라지고 무거운 상황에 짓눌린 채 돌아서고 만다.

이처럼 감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게 되면 점점 희미해 지거나 상황이나 다른 감정에 의해 설득 당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믿음은 감정이나 상황이 바뀐다고 해도 그 안에 생명이 있기에 오히려 어려운 상황이 몰려 오고 힘든 감정이 몰아칠 때 그 속에서 더욱더 빛나고 깊어지고 자라간다.

마치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던 것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것이 그 예이다.

이처럼 이들의 믿음은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오히려 더 연단되고 정금같이 나오게 되었다.

나는 오늘 믿음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감정으로 행동할 것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믿음이 없는 (감정적인) 행함은 나와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