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18. Monday, Genesis 37:14

 

2016. 01. 18. Monday

Genesis 37:14
Then he said to him, "Please go and see if it is well with your brothers and well with the flocks, and bring back word to me." So he sent him out of the Valley of Hebron, and he went to Shechem.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보내면서 그의 형제들이 평안(שׁלום, 샬롬)하며 가축들이 평안(שׁלום, 샬롬)한지를 알아보고 그 소식(דּבר = word)을 갖고 오라고 했다.

야곱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질투하며 요셉에게 화평(שׁלום)하게 말하지 못하는 불편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창 37:4)

Genesis 37:4
But when his brothers saw that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others, they hated him and could not speak peaceably to him.

만약 야곱이 요셉과 그 형들 사이에 있는 그러한 미움과 질투를 알았다면 요셉을 혼자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야곱은 그들의 미움과 질투를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들이 동생인 요셉에게 그렇게 나쁜 짓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말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믿고 신뢰하던 사람이 자기를 배신하고 등을 돌리거나 오히려 자기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981년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 범인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내던 김재규였다. 즉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것이다.


야곱은 그렇게 믿고 신뢰하던 아들들이었기에 자신의 짐승들을 다 그들에게 맡겼고 또한 요셉을 그들에게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짐승을 맡아 관리할 만한 신뢰와 태도는 갖추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아들인 요셉을 맞이하고 평화롭게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려보낼만한 관용과 신뢰는 없었다.

그리고 그 형제들 사이에서도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거짓말을 했고 결국은 아버지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즉 르우벤은 요셉을 살려서 아버지에게 데려가기 위해 요셉을 죽이지 말고 마른 웅덩이에 빠뜨리자고 했고, 나중에 르우벤이 없는 사이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팔고 나서 요셉이 없어진 것 때문에 당황해 하는 르우벤에게는 들짐승들이 요셉을 죽인 것이라고 시침을 떼고 모른척 한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옷을 찢고 거기에 염소의 피를 묻혀서 마치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처럼 위장했고 야곱은 철저하게 그 자식들에게 속고 만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야곱이 수십년 전에 뿌린 씨를 스스로 거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야곱도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죽인 염소의 가죽으로 손과 목덜미를 덮은 뒤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가서 자신이 에서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며 아버지를 속였다.


아버지의 편애로 이미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던 요셉이 자기가 꾼 꿈들을 형들에게 떠벌리며 자랑했기 때문에 형들의 질투까지 사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다.

즉 아버지의 편애로 뿌려진 미움의 씨앗과 요셉의 꿈 자랑으로 뿌려진 질투의 씨앗에서 자란 그 열매를 야곱과 요셉은 거두게 된 것이다.

내가 뿌린 씨는 반드시 내가 거두게 된다.

삶이란 곧 관계(relationship)이다. 내가 로빈손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떨어져 살지 않는 한 우리는 다양한 관계 속에 살아간다.

나에게 평안이 있고 내가 가진 소유물이 평안한 가운데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계에 평안이 없으면 아무리 나 혼자 평안하다고 해도 결국 평화롭지 못한 주변의 관계 때문에 그 평안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야곱은 요셉에게 형들과 짐승들이 평안한지를 알아보고 오라고 했으나 결과는 요셉과 이들의 관계에 평안이 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아버지 말씀을 따라 형들이 있는 곳까지 가 보면 (go and see) 그들 안에 무엇이 있고 그들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나게 된다.

늘 아버지 집에서 함께 살고 있을 때는 속에 있는 것을 숨기고 겉을 꾸미고 그런척 하며 살았으나 세겜(Shchem)까지 가 보고 도단(Dothan)까지 가 보면 그 속에 있는 것과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즉 세겜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찾던 것이 없을 때, 내 속에 아버지께 대해서 불신이 있는지 신뢰가 있는지가 드러나고 도단까지 가 보면 형들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가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Where are you staying?)"를 묻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 보라(come and see)!"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 가서 그가 사는 것을 본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생겼으며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기로 결정한다. (요 1:39)

John 1:39
He said to them, "Come and see." They came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remained with Him that day (now it was about the tenth hour).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가서 그 사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말로 삶을 속이고 감추기는 쉽지만 그가 사는 곳을 가 보면 그 삶을 감추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야곱은 요셉에게 세겜에 가서 형들과 가축을 보고 그에게 "말(word)"을 갖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갔던 요셉은 말도 삶(몸)도 모두 사라지고 자기가 특별히 만들어 입혔던 찢어지고 피묻은 옷만 "침묵(silence)"과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을 본 야곱은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전혀 사실이 아닌 말(word)이 상상으로 조작되어 야곱의 마음에 심겨진다. (창 37:33)

Genesis 37:33
And he recognized it and said, "It is my son's tunic. A wild beast has devoured him. Without doubt Joseph is torn to pieces."

이처럼 가서 사는 것을 보지 않으면 찢겨진 염소 피가 묻은 옷이나 염소 털로 덮힌 손과 목덜미 때문에 엉뚱한 말을 만들어 내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받아 들이며 믿게 된다.


이집트로 사라져 버린 요셉은 헤브론에서 자신의 말(word)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 아버지에게 22년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침묵을 깨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들 편에 자신의 말(words)을 보낸다.

하지만 야곱은 22년 뒤에 요셉이 보낸 말(words)을 믿지 못했지만 요셉이 보낸 수레와 선물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요셉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창 45:27-28)

Genesis 45:27-28
27 But when they told him all the words which Joseph had said to them, and when he saw the carts which Joseph had sent to carry him, the spirit of Jacob their father revived. 28 Then Israel said, "It is enough. Joseph my son is still alive. I will go and see him before I die."

"잡을 수 있으면 나를 잡아 봐(Catch me, if you can)!"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거짓말로써 자신을 비행사, 변호사, 의사 등으로 꾸미고 실제로 그렇게 위장해서 병원에서 일도 하기도 했으며 사람들을 깜쪽 같이 속였다. 그리고 그가 체포된 후에는 그의 탁월한 위조수표 기술 덕분에 미연방수사국(FBI)에서는 그를 설득해서 요원으로 섬기게 된다.


믿음은 보는 것에서 생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말만 한다면 결국은 그들이 들은 것으로 인해 정반대의 믿음(불신)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가 결국은 그 듣는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갖게 될지를 결정한다.

이처럼 믿음은 말로 전달되지 않고 삶으로 전달된다. 즉 믿음이 나의 삶을 통해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란 말로 끝나는 죽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가 믿음으로 살게 되면 그 믿음이 비로소 보여지게 된다.


나는 말로 삶을 전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삶으로 말을 전하는 사람인가?

삶이 있으면 "Here I am!( הִנֵּֽנִי)"으로 충분하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이든지 삶이 있으면 "Here I am!"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삶이 없으면 말과 온갖 수단으로 그 삶을 꾸미거나 위장하기 위해 분주한 삶을 살고 위장한 삶이 드러날까봐 불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삶이 있으면 "저는 이런 일을 합니다" "저는 이런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등이 아니라 "제가 여기 있습니다!"로 충분하다.
"Here I am!"

Genesis 37:13
And Israel said to Joseph, "Are not your brothers feeding the flock in Shechem? Come, I will send you to them." So he said to him, "Here I am."

Genesis 22:1
Now it came to pass after these things that God tested Abraham, and said to him, "Abraham!" And he said, "Here I am."

Exodus 3:4
So when the LORD saw that he turned aside to look, God called to him from the midst of the bush and said, "Moses, Moses!" And he said, "Here I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