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05. Tuesday, Genesis 37:3

 

2016. 01. 05. Tuesday

Genesis 37:3
And Israel hath loved Joseph more than any of his sons, for he is a son of his old age, and hath made for him a long coat;

37장 2절에서 "이것은 야곱의 이야기이다(This is the historyof Jacob.)"라고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셉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가 빠져 버리면 야곱의 이야기는 이어질 수도 없고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결국 요셉의 이야기 때문에 야곱의 이집트 이주와 정착,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야곱) 민족 형성, 이스라엘 나라의 출생과 홍해, 광야, 그리고 가나안이 약속의 땅으로 실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내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엮어지고 풀어지는 관계들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며 또한 내가 그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며 면이 입체가 되고 그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이야기를 따라 모여 연결이 되면 움직이는 만화 영화가 되듯이, 나의 오늘 하루란 작게 보면 한 점이나 한 올에 불과하지만 이 하루가 모여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되면 이 한 올 한 올은 무늬가 되고 그림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나타난다.

즉 나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형제들의 이야기가 되며 나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되고 결국은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생각하고 사는지에 따라 이 땅에 전해질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요셉이 짐승 떼를 치고 있을 때 그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있었고 특별히 아버지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레아의 아들들(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은 거기에 없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레아의 아들들은 제외하고 첩의 아들들에 대해서만 요셉이 나쁜 보고를 했다는 것일까?

어쨌든 겉으로 보면 이 기록은 두 첩의 아들들과 레아의 아들들, 그리고 라헬의 아들들로 분명히 구분되어 차별을 두고 있다.

또한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바로 전, 부인들과 아이들을 구분해서 줄을 세울 때 첩들과 아이들을 제일 앞에 세우고 그 다음에 레아와 그 아이들, 그리고 라헬과 요셉은 제일 뒤에 세워 차이를 두고 차별을 만든다. (창 32:2)

Genesis 33:2
And he put the maidservants and their children in front, Leah and her children behind, and Rachel and Joseph last.

하지만 가장 안전하게 제일 뒤에 줄을 섰던 라헬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제일 먼저 죽고 만다.

이렇게 인간이 세운 줄은 그럴듯해 보이고 나를 보호해 주며 나의 삶을 보장해 줄 것 같지만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사람이 세운 순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찾아오고 인간이 만든 보호(protection)와 보장(provision)이란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야곱은 첩들의 아들들과 레아와 라헬을 따로 구분하고 분리해서 줄을 세웠지만 하나님은 첩의 아들들까지 포함해서 12명의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시고 세우신다.

 
우리는 학력이나 능력, 재력이나 경력, 출신 배경이나 가문, 외모나 성격 등에 따라 구분하고 분리해서 줄을 세우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며 당신 마음에 합하다면 인간이 세운 모든 줄을 뛰어 넘어 뽑으시고 세우신다. (대하 16:9)

2 Chronicles 16:9
"For the eyes of the LORD run to and fro throughout the whole earth, to show Himself strong on behalf of those whose heart is loyal to Him. In this you have done foolishly; therefore from now on you shall have wars."

다윗이 그랬다. 그는 집 안에서 버림받은 아들이었기에 사무엘이 왔을 때 다른 모든 아들들은 모였지만 그는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줄에 끼이지도 못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시편 27:10)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거절 당하고 깨어진 다윗을 통해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신 예수님을 모퉁이돌로 쓰시는 당신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이 땅에 미리 보여 주셨다.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고 그에게는 특별히 다른 옷을 만들어 입혔다. 물론 성경의 기록은 그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기에 그랬다고 하지만,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는 가장 늦게 얻은 아들인 베냐민을 요셉보다 더 사랑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요셉을 다른 모든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고 그에게 특별 대우를 한 것은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첫번째 아들이었고 요셉이 (외모나 성격에 있어서) 라헬을 닮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랬기 때문에 라헬이 죽고 난 뒤 야곱은 라헬에 대한 못다한 마음을 요셉에게 쏟아 주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처럼 야곱이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랑한다는 그럴듯한 표면적인 이유나 핑계를 대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로 그를 더 알기 원해서, 리더이기 때문에, 체면 때문에, 모두가 해야하기 때문에, ...

즉 사람 때문에 하는가? 아니면 사랑 때문에 하는가?


사람들은 표면적인 이유나 행동들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신다. 그리고 그 마음의 동기를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동기(motivation)가 있으면 태도(attitude)가 달라지고 행동(action, behaviour)이 달라진다. 그리고 다른 옷을 지어 입히게 되고 다른 직책(position)을 주게 된다.

아하수에르 왕이 지나온 기록을 읽던 중 두 내시의 반역 사건을 읽었고 그 사실을 알린 모르드개에게 포상을 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는 하만을 불러 의견을 물은 뒤 자기 옷을 벗어 모르드개에게 입히고 왕의 말을 태워 성을 돌게 했다.

이것은 자기가 마땅히 포상해야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자기 실수나 불찰을 메우기 위해서 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자기 체면과 자기 이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에스더 6:9)

Esther 6:9
"Then let this robe and horse be delivered to the hand of one of the king's most noble princes, that he may array the man whom the king delights to honor. Then parade him on horseback through the city square, and proclaim before him: 'Thus shall it be done to the man whom the king delights to honor!'"


이집트의 바로 왕도 요셉의 꿈 풀이를 듣고 요셉을 총리로 세울 때 자신의 반지를 빼어 주고 세마포로 된 옷을 입히고 왕의 다음 가는 수레를 태우고 모든 사람이 요셉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이것도 결국 요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를 구하고 바로 왕이 살기 위해서 한 이기적인 결정이 아닌가? (창 41:42-43)

Genesis 41:42-43
42 Then Pharaoh took his signet ring off his hand and put it on Joseph's hand; and he clothed him in garments of fine linen and put a gold chain around his neck. 43 And he had him ride in the second chariot which he had; and they cried out before him, "Bow the knee!" So he set him over all the land of Egypt.


하지만 예수님의 동기는 사랑이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셨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모자를 씌우지만 정작 어린 아이들은 그 값어치나 디자인을 모른다.

이것은 곧 부모들이 자기들을 기쁘게 하거나 과시하려고 아이들에게 멋있고 화려한 옷을 입히는 것이며 아주 이기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입히시기 위해서 그 에덴 동산에서 당신의 어린 양의 가죽을 벗기셨고 우리의 수치를 가리고 입히시려고 당신의 아들이 벌거벗기우는 수치를 허락하셨다.

나는 야곱처럼 이기적인 동기로 아름다와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입히려고 하지는 않는가?

나는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남에게 그럴듯한 옷을 입혀주는 대신 예수님처럼 나를 비우고 낮아지며 벗기우고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자리로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