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03. Sunday, Genesis 37:1

 

2016. 01. 03. Sunday

Genesis 37:1
Now Jacob dwelt in the land where his father was a stranger, in the land of Canaan.

앞 장에서 에서의 족보와 족장들의 이름이 자세하게 나왔고 심지어 에돔 왕들의 족보도 기록되어 있다.

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는 야곱의 족보가 먼저 나오지 않고 세일 산지에 정착하는 에서의 족보가 먼저 장황하게 나온 것일까?

36장을 읽고 묵상하는 지난 40 여일 동안 야곱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 같았고 에서와 세일 산지가 무대(history)의 중심이 된 것처럼 보였다.

즉 마치 에서가 주인공처럼 나타나 세일 산지에서 번성하지만 결국 성경은 야곱의 가족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전개되고 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동안 모든 대중매체의 헤드라인이 ISIS(Islamic State Iraq & Syria)로 장식되었고 그들이 사람들의 목을 베는 것이 주요 기사였다.

그런데 어제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시아파의 최고 지도자 이맘을 포함한 47명의 시아파 무슬림이 테러 혐의로 처형되었고 시아파가 주를 이루는 이란과 바레인에서는 사우디를 비난하는 데모가 발생했다.

ISIS는 수니파이며 사우디도 수니파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시아파가 주를 이루며 그 세력을 펼치고 있는 이란과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이번 처형이 시행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와중에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는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아랍 청년이 기관총으로 두 명을 살해하고 여러 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1일에 발생했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칼과 가위 등의 테러로 이스라엘 곳곳에서는 공포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지만 국제 사회는 거의 침묵하고 있으며, 반대로 유럽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anti-Semitism)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시리아, 이리크에서 밀려 들어오는 전쟁난민들과 경제이민자들로 유럽은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진통을 겪고 있다.

비록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소식들은 테러나 신냉전 체제를 구축하는 소련, 미국, 중국, 그리고 종교와 정치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이슬람과 바티칸의 부상 등으로 요란하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로 에서가 번성하고 야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황이 열악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당신의 목적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나의 길이 열리지 않고 나의 일이 풀리지 않아도 조급해 하거나 낙심치 말자. 오히려 하나님은 나의 길을 막으시고 나의 일을 망치시면서 당신의 길을 여시고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할 때 예수의 영이 그의 길을 막고 트신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마게도니아로 가게 되고 유럽에 복음이 들어가게 된다.

요셉은 세겜으로 갔으나 형들을 만나지 못했고 도단으로 가서 형들을 만났으나 그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게 되고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나의 길이 막히고 나의 일이 틀어지면 화가 나고 주변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조급함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3월 말에 있는 조카 결혼식 때문에 한국 가는 표를 미리 예약을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더포지 모임이 있게 되고 노아도 함께 한국을 가기로 하면서 예약했던 날짜를 변경하는데 거의 380 파운드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예약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취소하면 공항세 35 파운드 밖에는 환불이 안된다고 했다. 이것은 내가 산 표가 싸게 나온 표이기 때문에 약관에 있는 조건이 그렇다고 했지만 화가 났고 여행사의 횡포처럼 보였다.  

결국 몇 번의 통화와 이메일을 여행사와 주고 받으며 지난 12월 31일에 날짜 변경을 하기로 했으나 내가 산에 캠핑 가 있는 동안에 이메일이 오면서 아직도 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

하나님은 나와 노아가 한국 가는 것을 막고 계신 것일까? 아니면 원수가 방해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나의 실수나 행정 처리 문제일까?

물론 내가 예약한 표를 완전히 포기하고 빚을 내서라도 새 표를 구입하면 문제는 금방 해결된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낭비이고 하나님께서 뭔가를 말씀하고 가르치시는 것이 있는 것 같아서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길이 막히고 이 일이 풀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여시고 다른 것을 푸시려는 것이 아닐까?

화를 내지 말자. 조급해 하지도 말자. 결국은 혼자 한국을 가게 되든지 노아와 함께 가게 되든지, 더포지 모임을 나 없이 하게 되든지 나와 함께 하게 되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여시고 당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다.


2007년 7월, 폐에 구멍이 나서 피를 쏟은 날 한 영국 할머니가 나에게 와서 두 번이나 강조하며 해 주신 말이 생각난다.

"You are not indispensable! Take day off tomorrow! ("너는 필수불가결한 사람이 아니야! 내일 하루 쉬어!"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너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내일 하루 쉬어!")


그렇다.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하늘이 닫히면 아무 것도 안된다. 하지만 하늘이 열리면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열리고 풀리게 된다.


야곱은 밧단아람 외삼촌 집에서도 20년간 눈치보며 쉼없이 살았고, 외삼촌 집을 도망치듯 떠나서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다가 엉덩이 뼈가 위골이 되어 병신이 될 때까지 쉼없이 좇고 쫓기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야곱이 더 이상 자기 힘으로는 도망칠 수도 없는 상태와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원수처럼 자기를 죽일 것 같았던 에서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여시고 그의 길을 트신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도 나그네였고 이삭도 나그네였다. 그리고 야곱도 나그네로 가나안에 정착을 한다. 나그네의 삶이란 정착할 수 없는 삶이다. 정착했다고 해도 언제든지 떠나야 하는 삶이 나그네의 삶이다.

나그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마구르(מגוּר = in the sense of lodging, a temporary abode, a stranger)"라는 말로 "임시 숙소" "나그네" 등의 뜻이 있고 그 뿌리가 되는 동사는 "구르(גּוּר = to turn aside from the road, to fear as in a strange place)"라는 말로 "길에서 벗어나다" "낯선 장소로 인해 두려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마고르(מגור = a fright, fear, terror)"라는 말은 "두려움" "공포"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처럼 나그네로 살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자로 인한 두려움이든지 재정에 대한 두려움이든지 먹을 것과 거할 곳에 대한 두려움 등 어딘가에 정착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 가운데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외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갖추고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정체성의 혼란이나 정서적인 불안,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등으로 인해 두려움 가운데 살아간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외적인 것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정착하지 못한 불안한 삶을 살 것 같지만 영원한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한 사람은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살아간다. (시편 1:2-3)

Psalm 1:2-3
2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i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3 He sha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rivers of water, that brings forth its fruit in its season, whose leaf also shall not wither; And whatever he does shall prosper.

하지만 주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갖추고 있으며 이 세상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두려움 가운데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요한 15:5)

John 15:5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He who abides in Me, and I in him, bears much fruit; for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가나안(כּנען)이란 낮아짐을 당한 사람, 무시 당하고 거절 당한 사람, 그래서 겸손케 된 사람이 거할 수 있는 땅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늘 나그네로 살게 될 것이다.

다윗도, 모세도, 요셉도 거절 받고 낮아진 뒤 그 땅에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홧김에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던 모세는 결국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했으나 나중에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거기서 그 땅을 밟게 된다.

가나안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동사는 "가나(כּנע = to bend the knee)"라는 말로 "무릎을 꿇다"는 뜻이다. 즉 누군가가 무릎을 꿇는다고 할 때 그것은 모욕이 될 수도 있지만 겸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겸손(humility)은 내가 마음 먹는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무시 당하고 모욕(humiliation)을 받으면서 형편없는 처지에 떨어지면 비로소 겸손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면 언제나 예수님께 깊이 뿌리 내리고 그 분을 따라 살아간다면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