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01. Friday, Genesis 36:43

 

2016. 01. 01. Friday

Genesis 36:43
Chief Magdiel, and Chief Iram. These were the chiefs of Edom, according to their dwelling places in the land of their possession. Esau was the father of the Edomites.

호리 족의 왕정이 지난 후 에돔(Edom)이라는 한 이름 아래 11명의 족장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다. 왕정 체제 후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에서(Esau)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에돔이 11개의 족속으로 변해 간다.

결국 이들 족장들은 사람(people)과 거주할 장소(dwelling place), 그리고 소유 영토(land of possession)가 있었기 때문에 족속을 이루고 족장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란 결혼해서 임신하고 출산하면 생긴다고 해도 거주할 장소는 텐트를 치든지 집을 짓든지 동굴을 파야 하고 소유 영토는 힘으로 정복하든지 돈으로 사야 한다.

즉 거주할 장소와 소유지는 그냥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특별히 세일(Seir)의 후손인 호리(Horites) 족이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던 세일 산지였기에 돈으로 샀거나 힘으로 정복했거나 통혼으로 흡수했을 수도 있다.


어제 산에 도착하자 마자 비가 오기 시작했고 급한 마음에 빨리 텐트를 치느라 방수 덮개를 뒤집어 쳤다. (급하게 하면 안팎이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2박 3일 거할 나의 임시 처소를 다 만들고 나자 바지가 완전히 젖고 말았다.

이처럼 거할 곳(dwelling place)을 만들려면 값을 치루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임시 처소든지 장기 처소든지, 텐트든지 동굴이든지 집이든지 시간과 힘을 쏟고 자재를 동원해야 한다.

거할 곳이란 지붕이 있고 벽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 동굴은 벽을 파 내고 공간이 없던 곳에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텐트는 위가 열려 있고 사방이 열려 있는 곳에 벽과 지붕을 만들어 닫힌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내가 갖고 온 텐트는 4인용 텐트이다. 하지만 짐이 많으면 두 사람 밖에 잘 수 없다. 그러므로 네 명이 자려면 짐을 밖으로 치우고 네 명이 거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즉 4인용 텐트를 쳐도 내부에 충분한 공간이 없으면 네 사람이 들어가 잘 수는 없다.


이미 하나님은 다윗(David)의 내면에 400 명이 거할 충분한 아둘람의 공간을 만들어 두었던 것일까?

다윗은 가족들로부터 받은 거절감과 사울 왕으로부터 받은 거절과 공격으로 인해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절실히 찾게 되었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오면서 그의 내면은 더욱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둘람 굴로 찾아온 400명의 빚지고 상하고 원통한 사람들 뿐 아니라 자기를 거절하고 광야로 보냈던 자기 부모와 형제들을 받아 주었던 것은 물론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 다니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품고 살려 줄 수 있었다.

나의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4명 정도 편하게 거할 수 있을까? (400명이 거할 수 있는 아둘람의 공간이란 상상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왜 12명 밖에 부르지 않은 것일까? 사울 왕은 3천 명의 일류들을 불렀고 다윗에게는 400명의 잡류들이 오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당신의 내면에 충분히 품고 쉼을 주며 인내하고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이 12명 정도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물론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을 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삶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내 삶이 공개되고 삶이 공유된다는 것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이나 매일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을 참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삶이 공개되지 않고 삶이 공유되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말로 떼울 수 있고 삶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삶이 공개되고 공유되면 함께 나누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때로는 다투기도 하겠지만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다.


나는 가끔 더포지 공동체에 함께 사는 사람들 뿐 아니라 나 자신조차 품을 공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씩 함께 사는 사람들을 통해 나를 광야로 내몰고 그 내면의 광야에서 나의 내면을 깊고 넓게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함께 거할 곳이 없으면 함께 거하지 않아도 되고 혼자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이란 적어도 두 세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도 함께 세워가는 것이다.

이렇게 혼자 있는 광야의 시간이 없으면 결코 나의 내면을 돌아볼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의 내면을 넓히시고 깊게 하실 수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거할 수 없다.

그래서 모세도 자기의 개인 텐트를 갖고 진영 밖에 나가서 하나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고 예수님도 새벽 일찍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아버지와 홀로 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이제 2016년 1월 1일이 되었다. 하지만 뭔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숫자로 보면 내 나이가 한 살 더 많아졌고 밖에는 비가 그쳤으며 기온이 더 떨어져 물이 얼기 시작했고 내가 텐트 안에서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의 내면은 어떤가? 어제 라면과 비스켓으로 떼운 위장이 먹을 것을 요구하지만 나의 심장은 위장의 요구를 뒤로하고 하나님의 심장에서 나오는 박동 소리에 더욱더 귀를 기울인다.

밖에는 지난밤 쏟아진 비로 불어난 개울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끊임없이 박동치며 흘러가는 물소리가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장 소리처럼 밀려온다.


에돔의 족장들이 소유지로 삼은 땅은 세일 산지였고 이미 호리 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값을 치루고 그 땅을 소유했어야 했을 것이다.

나도 천국을 차지하려면 합당한 값을 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소유하지 못하거나 소유했다고 해도 불법 소유지가 되어 다시 돌려 주거나 빼앗기게 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며, 이것이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내가 치루어야 할 댓가이다. (마 5:3,10)

그리고 땅을 유업으로 받기 원하면 온유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부동산 업자가 되려면 눈에 보이는 (밖에 있는) 부동산을 찾아 다니기 전에 먼저 속에 있는 땅을 살피고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 5:5)

Matthew 5: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Matthew 5: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Matthew 5: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이 에돔 땅 족장들의 역사는 에돔의 아버지 에서로 인해 시작된 것이다. 즉 에서가 없었거나 에서가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족장들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내와 잠자리를 해서 임신이 되고 출산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내가) 해산의 고통만 겪으면 된다. 이처럼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산고를 치러야 하지만 아버지가 되는 것이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고 끝없는 여정이며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아버지로 인정해 주지 않으면 진정한 아버지가 아니다. 즉 호적상으로는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지만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아버지 노릇을 못하면 자식에게 아버지로 인정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  스스로 (예수님의) 아버지 되는 자리를 포기하셨고 예수님도 그것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신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오, 나의 아버지,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마 26:39)

Matthew 26:39
He went a little farther and fell on His face, and prayed, saying, "O My Father, if it is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You will."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완전한 단절과 거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마 27:46)

Matthew 27:46
And abou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with a loud voice, saying, "Eli, Eli, lama sabachthani?" that is,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나는 아버지로서 제대로 자녀를 돌보고 양육하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녀로 받아들이기 위해 아버지 됨을 포기하는 자리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더포지 공동체에서 나의 역할이 아버지의 역할이 맞다. 그래서 쉽지 않다.

그냥 리더이고 책임자라면 일을 처리하듯 쉽게 처리할 수 있을텐데,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양육하고 훈계하며 돌보고 자라가게 해야 하는 희생과 책임이 있다.

아버지는 전체 가족의 책임자로 머리이지만 발처럼 가장 밑바닥에서 섬겨야 하고 가족을 위험에서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로 살기보다 잘 가르치는 좋은 선생으로 살기 원하며 잘 놀아주고 가끔 맛있는 것 사다 주는 좋은 삼촌 정도로 살기 원하는지 모른다. 아니면 폭군이나 독재자로 살기도 한다. (고전 4:15)

1 Corinthians 4:15
For though you might have ten thousand instructors in Christ, yet you do not have many fathers; for in Christ Jesus I have begotten you through the gospel.


에돔(אדום = red)의 아버지는 에서이고 아담(אדם = red, ruddy)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손수 빚어 만드신 "처음 아담"과 이 땅에 찢어지는 사랑의 마음으로 내어 주신 "마지막 아담"의 아버지는 같은 분이시며 처음 아담 때문에 마지막 아담이 온 몸에 피로 범벅이 된 채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나는 이 하나님 아버지처럼 자기 자식 때문에 살고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는 자리에 내어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만약 나에게 이 사랑이 없다면, 이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고 무엇을 소유하든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고전 13:2-3)

1 Corinthians 13:2-3
2 내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3 또 내가 내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2 And though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though I have all faith, so that I could re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3 And though I bestow all my goods to feed the poor, and though I give my body to be burned, but have not love, it profits me no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