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8. Monday, Genesis 36:39

 

2015. 12. 28. Monday

Genesis 36:39
And when Baal-Hanan the son of Achbor died, Hadar reigned in his place; and the name of his city was Pau. His wife's name was Mehetabel, the daughter of Matred, the daughter of Mezahab.

히브리어에서 바알(בּעל)이란 "남편" "주인"을 의미하는 말이며 이스라엘이 곧잘 섬기던 우상 "바알 신"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은혜의 소유자"라는 뜻을 가진 바알 하난(בּעל חנן = possessor of grace, master of grace)이 죽었다는 것은 슬픈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가 주인처럼 붙들고 조종하던 있던 은혜가 자유롭게 풀려나게 되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은혜"란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고 흘러가게 된다. 즉 은혜란 내가 소유하고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은혜에게 소유 당하고 내가 그 은혜로 인해 죽을 때 비로소 은혜가 풀려나게 되고 흘러 간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를 은혜 안에서 자유케 한다. 내가 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점점 더 묶이고 자유를 잃게 되며 두려움 가운데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자리이며 어떤 소유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안다면 마치 내가 죽은 것처럼 그것을 포기하고 내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면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고전 15:10)

1 Corinthians 15:10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ward me was not in vain; but I labored more abundantly than they all, yet not I, but the grace of God which was with me.


악볼(עכבּור = mouse, attacking, nibbling)
의 아들이 왕이 되어 에돔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은 큰 은혜이다.

우리는 악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새앙쥐처럼 조금씩 갉아 먹고 공격하는 야비한 사람이거나 아주 하찮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아들에게 "은혜의 소유자" "은혜의 주인"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에는 새앙쥐 같은 악볼의 아들이 에돔의 왕이 된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만약 내가 어디서 왔고 어떤 존재였는지를 잊어버린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될 것이고 그의 은혜없이 살게 될 것이다.

다윗은 이름없는 베들레헴의 목동이었고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당하고 버림받았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고 난 뒤 자기가 어디서 왔고 어떤 존재였는지를 잊고,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잊었으며 남의 아내를 취하고 그 남편을 죽이는 사악한 짓을 행한다. (삼상 12:7)

2 Samuel 12:7
Then Nathan said to David, "You are the man! Thus says the LORD God of Israel: 'I anointed you king over Israel, and I delivered you from the hand of Saul.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잊어버리면 내 삶은 그것으로 끝이다. 내가 잘난 맛에 살아간다면 내 삶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에 있었고 어떤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나의 자리나 소유를 언제나 그 분께 돌려드려야 한다. (시 40:1-2)

Psalm 40:1-2
I waited patiently for the LORD; And He inclined to me, And heard my cry. 2 He also brought me up out of a horrible pit, Out of the miry clay, And set my feet upon a rock, And established my steps.

에서의 족보 앞 부분에 보면 특이하게 아내의 이름이 나오고 그 아내가 누구의 딸이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나온다. (창 36:14)

Genesis 36:14
These were the sons of Aholibamah, Esau's wife, the daughter of Anah, the daughter of Zibeon. And she bore to Esau: Jeush, Jaalam, and Korah.


그리고 오늘 에돔 왕들의 족보 마지막에도 보면 왕의 이름과 그의 아내의 이름이 나오고 그녀가 누구의 딸이었는지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Genesis 36:39b
His wife's name was Mehetabel, the daughter of Matred, the daughter of Mezahab.

이들의 족보는 계속해서 아들들의 이름만 등장하지만 처음과 끝에 아내와 딸이 기록된 것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아내와 딸이라는 존재없이 뭔가 시작되고 마무리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비록 족보의 중간에 그 존재가 없어 보이더라도 이름없는 (여인들의) 존재가 없이는 족보가 이어질 수 없다.

에덴 동산에 등장했던 첫 신부인 하와 없이 계시록의 나오는 마지막 신부인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무대 앞에 등장하는 아들들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이름없이 그 역사(history)를 이어가는 여인들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

배경은 눈에 그렇게 튀어 나오지 않지만 이 배경이 없으면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보면 초등학교 때에는 반장 역할도 하고 달리기도 잘해서 학교 대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나 고등학교, 대학교 때에는 거의 배경으로 있었고 몸이 아파서 휴학을 했다가 복학하면서 비폭력 학생 운동을 통해 무대에 약간 드러나기도 했지만 언제나 배경으로 살아온 것 같다.

영국에 와서도 선교센타에서 강의를 했던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화장실 청소며 건물 수리 등 뒷치닥거리가 나의 주된 역할이었다.

지금 나는 더포지 대장간이라는 작은 공동체의 리더를 맡고 있다. 이 역할은 때때로 참으로 불편하기도 하고 도전적이라서 무대 뒤로 숨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역할임을 알기에 여기에 서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후에 하나님은 나를 무대 앞에서 조금씩 물러나게 하시며 내 안에서, 우리 가운데서 친히 뭔가를 하고 계신 것 같다. 그래서 기대가 되고 감사하다.

에돔의 마지막 왕처럼 보이는 하달(הדר = honour, to swell up) 왕은 파우( פּעוּ = screaming, 비명)라는 도시에 살았다.

은혜가 사라지고 없으면 비명으로 가득찬 도시가 되며 은혜가 충만하면 굳이 말이 필요없고 웃음이 가득한 도시가 될 것이다.

하달의 아내는 참으로 놀라운 이름과 배경을 가진 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번창하며 황금이 물처럼 흐르는 재력이 있고 뛰어난 배경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은혜가 없으면 결국은 마지막 왕이 되고 왕국의 족보가 거기서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