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5. Friday, Genesis 36:37

 

2015. 12. 25. Friday

Genesis 36:37
And when Samlah died, Saul of Rehoboth-by-the-River reigned in his place.

삼라(שׂמלה = a cover, a garment, a mantle, 겉옷, 껍데기)가 죽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소식이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땅에 떨어져 그 껍질(שׂמלה)이 썩어지면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발아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는 자신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그의 죽음은 주변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고 슬픈 소식이 될 수도 있다.

폭군이고 정말 꼴도 보기 싫었던 사람이 죽었다면 그 죽음은 기쁜 소식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은 슬픔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변 사람들의 기쁘고 슬픈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껍질)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궁극적으로 그 죽음이 기쁨이 될 수도 있고 슬픔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절망을 갖고 왔다. 하지만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너무나 기쁘고 시원한 소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제자들이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반응과는 전혀 상관없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류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결코 죽음에게 삼키울 수 없었으며 오히려 죽음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었기 때문이다. (고후 5:4)
 
2 Corinthians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For we who are in this tent groan, being burdened, not because we want to be unclothed, but further clothed, that mortality may be swallowed up by life.

그러므로 한 사람의 죽음은 평소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느냐에 따라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고 슬픈 소식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 남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축하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은 그의 죽음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처럼 여기며 슬퍼했다.

그러나 남과 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보다 그 안에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가 그 무엇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감정은 시간이 지나고 주변 환경이 바뀌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해도 그 기억 조차도 오래 가지 않고 먹고 살기에 바쁜 삶의 일상과 분주함 속으로 이내 사라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 생명이 없는 죽음은 썩는 냄새만 풍기고 사람들을 떠나게 하지만 그 안에 생명을 갖고 있는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낳게 된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 있는 생명이 드러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내 안에 그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틀에 짜여진 종교적인 삶과 분주한 세상의 삶에 갇힌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정신없이 쫓기며 살아갈 것이다.


죽음이 와야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드러난다. 나에게 죽음이 온다면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드러날 것이다.

죽음은 그가 어떤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얼마만큼 공부를 많이 했고 얼마나 많은 소유를 갖고 있든지 상관없이 찾아온다.

죽음은 그가 얼마나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고 신체적으로 얼마나 건강한지에 상관없이 예측할 수 없는 온갖 형태로 찾아와서 우리에게 죽음을 소개한다. (질병, 교통사고, 공중폭발, 저격 등등)

어제 영국에서 코스타라는 커피숍에 난데없이 승용차 한 대가 길에서 들이닥쳐 커피를 마시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대하던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끔직한 일이 발생했다.
 

바로 왕이 아무리 많은 군대와 무기로 궁궐을 방어하고 있었다고 해도 유월절에 그 첫 아들의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죽음은 이처럼 나이나 성별, 배경이나 조건,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따지지 않고 냉혹하게 찾아 온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충성되게 살았던 사람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에게 죽음이 찾아 왔을 때 그는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빌미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2 Kings 20:3
"Remember now, O LORD, I pray, how I have walked before You in truth and with a loyal heart, and have done what was good in Your sight." And Hezekiah wept bitterly.

그리고 15년 간 그의 생명이 연장되지만 이 연장된 삶으로 인해 바벨론의 사신을 영접하게 되고 결국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이어지는 빌미를 제공한다.


우리는 죽음이 찾아 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저항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원수가 우리에게 죽음을 갖고 올 때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음을 허락하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120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시력이 온전했고 그 힘이 여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죽음을 보내셔서 그를 그 땅에서 거두어 가신다.

12살된 야이로의 딸이 병으로 죽었지만 예수님은 죽음과 슬픔을 부추기는 무리를 집 안에서 몰아 내시고 그녀를 살리셨다.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 장례식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추시고 그를 살리셨다.

하지만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어 묻힐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째가 되었을 때 그를 살리신다.

사람들이 그를 벼랑 끝에 밀어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그들을 피하셨으나 자기를 잡으러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난 군인들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잡히셨다.

Luke 4:28-30
28 So all those in the synagogue, when they heard these things, were filled with wrath, 29 and rose up and thrust Him out of the city; and they led Him to the brow of the hill on which their city was built, that they might throw Him down over the cliff. 30 Then passing through the midst of them, He went His way.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이 죽음을 저항해야 할 때와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를 아시고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반응하셨다


만약 내가 질문없이 인생을 살아간다면 내 삶은 잘 짜여진 쳇바퀴 안에서 잘 길들여진 동물처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왜 그렇게 달리는지도 모른채 열심히(?) 정신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참 생명이란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처럼 수 많은 질문들이 있다. 만약 내 삶에서 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 잘 길들여진 동물처럼 살고 있거나 잘 순종하는 노예와 같이 생명과 자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삼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울(שׁאוּל = asked)은 (유프라테스) 강가의 르호봇(רחבות = streets)이라는 곳에 정착하고 다스린 사람이었다.

사울에게는 질문들이 있었을까? 그는 유프라테스 강가의 비옥한 곳에서 잘 정착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질문없이 인생을 누리며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솔로몬은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많은 질문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는 것이었다.

해 위에 계신 그 분을 찾아 가는 질문없이 매일매일 해 아래서 수고 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이란 잠깐이며 결국은 헛되고 헛된 것으로 끝나 버린다.

내가 생명이신 그 분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내가 수고한 것이 아무리 엄청난 사역이고 삶이라고 해도 결국은 의미없는 것이며 죽음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질문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 분 심장 안에 있는 것을 찾아가기 위해 시간을 보내며 질문하고 질문해야 한다.

사무엘 때에 등장하는 사울 왕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있는 것을 멸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찐 짐승들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고 살찐 짐승들을 살려두었으며 아각 왕도 살려 두었다.

사울 왕은 7일 동안, 그리고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로 인해 두려움으로 사람들이 흩어지는 상황 때문에 사무엘이 오기 전에 번제를 드리고 말았다.

엄청난 전쟁을 치루고 승리를 계속하던 여호수아도 떨어진 옷과 신발, 곰팡난 빵과 헤어진 포도주 부대를 가지고 나타난 기브온 족속의 말만 듣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평생 그들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를 허락하고 말았다.

너무 자신만만했기에 방심한 것이 아니었을까?

오늘은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날이다. 이미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먹고 마시고 주고 받고 즐기는 상업적이고 세속적으로 변해버린 분위기가 즐비하다.

그래서 오늘도 질문하며 살아야 하고 죽음을 직면하는 태도를 갖고 깨어 있어야 한다. 오늘이 이 땅에서 나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나의 죽음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슬픈 소식이 될까? 아니면 기쁜 소식이 될까? 만약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된다면 왜 기쁜 소식이 될까?

나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든지 슬픈 소식이 되든지 상관없이 그 죽음 자체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생명을 낳으며 영원으로 이어질 것인가?

예수님의 탄생은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었지만 헤롯 왕에게는 나쁜 소식이었고 그 때문에 살해 당한 아이들을 둔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슬픈 소식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 오지는 않는다. 무슬림 가정에서 자란 사람에게 예수님이 태어나게 되면 그는 죽임을 당하든지 가족으로부터 추방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왜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는가? 나는 이러한 핍박이 없기 때문에 기뻐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도 오히려 기뻐한다. 어디서 이러한 기쁨이 나오는 것일까?

나는 예수님의 탄생 뿐 아니라 그의 죽음도 기뻐하는가?

나는 나의 죽음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까? 새로운 생명의 출생이란 나의 죽음없이 주어질 수 없다.

Philipians 4:4-7
4 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5 Let your gentleness be known to all men. The Lord is at hand. 6 Be anxious for no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7 and the peace of God, which surpasse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through Christ Jes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