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1. Monday, Genesis 36:33

 

2015. 12. 21. Monday

Genesis 36:33
And when Bela died, Jobab the son of Zerah of Bozrah reigned in his place.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 바스맛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르우엘이고 르우엘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 가운데 세라(Zerah)가 있었다. 그리고 이 세라의 아들이 요밥(Jobab)이고 벨라가 죽었을 때 그를 이어 왕이 된다.

벨라는 그의 뒤를 이어갈 아들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당시의 왕위 계승은 혈통적 계승이 아니라 그 다음 왕은 다른 부족에서 돌아가며 하는 형태였을까?

어떻게 해서 세라의 아들 요밥이 왕이 된 것일까?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요밥이 가진 영향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요밥이 왕이 된 것일까?


어쨌든 벨라(Bela = destruction, 파괴, 멸망)라는 에돔의 첫 왕의 죽음은 큰 변화를 갖고 왔다.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벨라는 자기가 가진 왕권으로 파괴를 일삼았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 때문에 세라(Zerah =a rising light)라고 하는 "떠오르는 빛"으로부터 태어난 아들을 요밥(=howler, 부르짖는 자)으로 부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결국에는 그가 왕이 된 것은 아닐까?


비록 이름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한 사람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갖고 오기 때문에 출생보다 죽음이 훨씬 의미있고 강력하다. 특별히 폭군이나 독재자의 죽음은 곧잘 한 나라에 새 역사를 갖고 온다. 즉 그의 죽음은 새로운 질서나 무질서를 갖고 온다.

때로는 질서(order)라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잘 포장된 장애물일 수 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무질서(disorder)와 혼란(chaos)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기회를 제공하고 문과 길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전의 상태인 창세기 1:2절을 보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차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질서정연하게 잘 갖추어져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도 없을뿐 아니라 말씀이 주어진다고 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거기에 반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삶에 무질서와 혼란을 허락하시거나 조장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당신을 찾고 당신께 귀기울여 들으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기 원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잘 조직되고 안정된 그 속에 눌러 앉아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영원한 것을 향해 돌리시기 위해 혼란이나 공허, 핍박이나 죽음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죽음이란 결코 듣기에 아름다운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새로운 것을 보면 신비로울 만큼 놀랍다.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이 죽고 난 뒤 무질서 속으로 빠졌고 리비아는 카다피가 죽고 난 뒤 혼란 속으로 빠졌다. 그리고 두 나라가 모두 ISIS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아직도 로버트 무가비가 집권하고 있는 짐바브웨는 겉으로는 안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가 죽고 나면 어떤 변화가 있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수많은 서구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재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뒷힘이 되고 있기에 서구에서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베네주엘라의 전 대통령 우고 차베즈(Hugo Chàvez)가 장기 집권할 당시(1999~2013) 나름대로 나라는 안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Nicolàs Maduro)는 난항을 겪고 있다.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를 다스릴 때(1991~1999) 러시아는 빚으로 나라가 국제적인 파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발디미르 푸틴(2001~2008, 2012~현재)이 대통령이 되면서 그는 강력한 러시아를 표방하고 외교력과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새로운 시작이란 뭔가를 추가하고 더하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없애고 줄이면서 시작된다.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새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경험을 쌓고 재정을 모우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 일을 준비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new beginning)은 줄이고 없애고 버리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주어진다. 만약 이러한 죽음의 과정이 없다면 계속해서 늘리고 껴입고 쌓아가는 것을 통해 결국은 과거라는 두꺼운 무덤에 갇힌 채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았고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라는 엄청난 신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가롯 유다는 모든 것을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에 결국은 영원한 것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그 부자 청년 관원도 율법을 나름대로 잘 지키며 살았던 신실해 보이는 종교인이었고 영생에 대한 갈급함 때문에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나왔다. 그러나 그는 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심히 슬퍼하며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돈을 향해 떠나고 말았다.

골리앗의 죽음이 다윗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울 왕의 죽음은 다윗에게 통일 왕국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가져다 주었고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을 갖고 왔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원하지는 않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밀어내고 죽일 수밖에 없다.

벨라는 어떤 이유로 죽었을까? 자연사였을까? 아니면 살해를 당한 것일까? 벨라의 죽음으로 요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만약 벨라가 죽지 않았다면 요밥은 평생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했어야 했을지 모른다.


모세가 죽었을 때 그의 수종자 여호수아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물론 여호수아는 모세가 이끌던 그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심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힘과 전략을 주심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 간다.

만약 모세가 죽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함께 들어갔다면 여호수아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며 해와 달이 멈추는 기적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드러나고 여호수아의 방법이 드러나려면 모세가 사라져 주어야 한다. 모세가 사라지지 않으면 언제나 사사건건 간섭하게 되고 새로운 세대와 하나님 나라가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으로 자신들을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을 때 하나님이 친히 피 묻은 손으로 만든 가죽 옷을 갖고 그들을 찾아 오신다. 그 한 짐승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아담과 하와가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짐승은 아담과 하와를 대신해서 그들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피흘리며 죽었고 그 가죽마저 빼앗겼다.

어쩌면 그 짐승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아니었을까? 시간 속에서는 십자가 사건이 수 천년 뒤에 일어났지만 시간의 차이가 없는 영원 속에서는 이미 그때 그 어린 양의 대속의 죽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은 우리에게 포기하고 죽는 것을 가르치치 않고 상대방을 어떻게 짓밟고 죽이는지를 가르친다. 하지만 그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죽는 것을 가르치시고 친히 그 죽음의 본을 보여 주셨다.

나의 포기와 죽음이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 풀어낼 수 있다면 혼돈과 공허, 어둠과 두려움이 있겠지만 이미 십자가로 모든 것을 완성하신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것이 이름이든지 자리든지, 경험이든지 소유든지 기꺼이 나를 내려 놓고 오늘도 죽음의 자리로 나아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