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24. Wednesday, Genesis 38:10

 

2016. 02. 24. Wednesday

Genesis 38:10
And what he did was evil in the eyes of Jehovah, and He also killed him. 


유다의 첫째 아들 엘은 하나님의 눈에 "사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였고 둘째 아들 오난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사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였다.

Genesis 38:7
And Er, Judah's first born, was evil in the eyes of Jehovah. And Jehovah killed him. 
악을 행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과 악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다른 것이다.

한 경우는 사람이 악한 것(being evil)이고 한 경우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의 행위가 악한 것(doing evil)이다.

즉 겉으로 악을 행하지 않아도 악한 사람이 있고 원래 악한 사람은 아닌데 감정과 상황 때문에 순간적으로 폭발해서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그가 어떤 존재이거나 어떤 것을 행했든지 간에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행위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즉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우리가 마음에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만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만 품어도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은 죄인일 뿐이다.

Romans 3:10-12
10 according as it has been written, "There is none righteous, not one!" 11 There is none that understands, there is "not one that seeks after God. 12 All turned away, they became worthless together, not one is doing goodness, not so much as one!"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외국에 나가 창녀들과 함께 다 써 버린 작은 아들이 행한 짓을 보면 그는 사악한 아들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매일 매일 성실하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들판에 나가서 뼈빠지게 일한 큰 아들은 착하고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아들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작은 아들이 나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눈으로 볼 때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착한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작은 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잘 알며 그 정체성 속에서 부자 관계를 마음껏 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큰 아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쉬지도 않고 일하는 착한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의 눈으로 볼 때는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처럼 일했고 아버지를 주인처럼 생각해서 염소새끼 한 마리도 요청하지 못하며 두려운 가운데 살았기 때문이다.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서 벳세메스에 머물지만 그 언약궤를 쳐다본 연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그 리고 그 언약궤가 기랏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머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윗은 그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가져 오려고 수레를 준비하고 온갖 악기와 사람들을 준비했으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비후가 그 수레를 몰고 있었다.

그런데 수레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면서 (언약궤를 보호하려고) 웃사가 손으로 언약궤를 붙들었고 하나님의 노가 웃사에게 임함으로 그가 죽임을 당한다.

2 Samuel 6:6-7
6 And when they came to the threshing floor of Nachon, and Uzzah reached out to the ark of God, and took hold of it, for the oxen nearly upset it , 7 then the anger of Jehovah glowed against Uzzah. And God struck him there for the fault. And he died there by the ark of God.

여기서 웃사가 잘못한 것은 없다. 그는 수레를 몰고 있었고 소들이 뛰면서 언약궤가 위험하므로 보호하기 위해 붙든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웃사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를 쳐 죽인 것일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이상 머물 때 웃사는 매일 거기에 머물러 있는 그 언약궤를 예사롭게 대했는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소가 뛰는 그때도 언약궤를 예사롭게 만진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예사로 여기거나 심지어 우습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평상시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마음과 생각과 태도를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하찮은 것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우 리가 속이고 거짓말 하고 추악한 삶을 내 마음대로 살아도 감옥에 갇히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오히려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나곤의 타작마당까지 아무 탈없이 잘 왔다고 해서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크게 틀린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내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거나 그 분의 역사가 정지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가능성이 많다.

사실 웃사가 죽게 된 것은 다윗의 잘못이었다.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가 돌아올 때는 블레셋 사람들이 긴장한 가운데 젖먹이가 있는 암소(פּרה = cow) 두 마리가 끄는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조용한 가운데 보냈다.

하 지만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올 때에는 젖먹이 있는 암소(פּרה)를 사용하는 대신에 땅을 일구는 강한 종류의 소(בּקר = ox, to plough, to break)를 사용해서 수레를 끌게 했고 음악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움직였다.

그리고 블레셋에서 오는 소들은 누구도 호위하지 않았고 젖먹이를 뒤에 두고 내내 울면서 갔지만 그 감정이나 자신들의 배고픔에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자신들의 죽음이 기다리는 벳세메스로 곧장 올라갔다. (그들이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 소들을 잡아서 번제로 바친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는 레위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수십년 전에 언약궤를 그렇게 보냈기 때문에 그 전통을 따라서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전통은 중요하고 처음 믿음의 길을 나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성경적이지 않은 전통은 생명을 죽이고 우리에게서 기쁨을 앗아간다.

(벳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까지 언약궤를 옮길 때는 어떻게 옮겼을까?)


우리는 다윗이 엉뚱한 소를 사용했고 악기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소들이 놀라서 뛰었고 웃사가 언약궤를 보호하기 위해 만짐으로 죽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블레셋 사람들이 이전에 했던 경험과 전통을 따라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안전하게 운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 Chronicles 15:3-4
3 And David gathered all Israel to Jerusalem, to bring up the ark of Jehovah to its place that he had prepared for it. 4 And David gathered the sons of Aaron and the Levites.

1 Chronicles 15:15
And the sons of the Levites carried the ark of God, as Moses commanded, according to the word of Jehovah, by staves above on the shoulders. 

하나님 진리의 기준을 잃어 버리면 이렇게 온갖 전통이나 경험, 이론이 난무하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호하려는 사람의 죽음까지 부르게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윗을 죽이지 않고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이 이들을 죽이셨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악한 짓을 한  사악한 하나님으로 몰아간다.

사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기준을 잃어 버린채 사악했거나 사악을 행한 것이지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신 것이 아니다.

독이 든 음식물을 먹으면 죽게 되고 독가스가 있는 방에 들어가면 죽게 된다.

하나님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고 그 방에 들어갔다면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어 보내신 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하 지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죽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 대신에 어린 양을 죽이시고 그들은 에덴 동산 밖으로 추방하신다. 즉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이 한 짓에 대해서 그 댓가를 받되 그 동산에서 추방됨으로써 오히려 은혜를 입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기서 쫓겨나지 않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다면 그들은 영원한 수치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 나무가 없는 에덴 동산 밖에서 죽음을 통해 영생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고 믿음으로 그 영원을 추구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하늘을 떠나 이 땅에 오셨고 사악한 분도 아니고 사악한 짓을 행한 분도 아닌데 그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당했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죄악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는데 명수들이다.

하나님께 뒤집어 씌우고 다말에게 뒤집어 씌워 친정으로 보낸다. 마치 다말 때문에 엘과 오난이 죽은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는 그들의 사악함과 그들이 행한 사악한 행위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어린 양의 가죽을 벗겨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셨고 우리가 입어야 할 죄인의 옷을 스스로 입고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누리고 살아갈지 그 진리의 기준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 진리를 따라 믿음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전통이나 경험을 따라 잔머리 굴리며 살아갈 것인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