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18. Thursday, Genesis 38:5
2016. 02. 18. Thursday
Genesis 38:5
And she continued still and bore a son. And she called his name Shelah. And he was at Chezib when she bore him.
첫째와 둘째 아들을 낳을 때와 세째 아들을 낳을 때를 묘사한 성경에 묘한 차이가 보인다.
첫 째와 둘째는 "임신을 하다"는 동사인 "하라(הרה = to be conceive, to be pregnant)"가 쓰인 반면에 세째 아들 셀라는 "더하다" "계속하다"는 동사인 "야삽(יסף = to add, to continue)"이 사용되었다.
이 "야삽"이라는 말은 라헬이 그녀의 첫째 아들을 출생한 뒤 하나님이 아들을 더 주시기를 원해서 붙인 "요셉(יוסף)"이라는 이름의 뿌리가 되는 동사이다.
그 리고 세째 아들 "셀라(שׁלה = a prtition, a request)"라는 이름의 뜻은 "묻다" "요구하다" "구하다"는 뜻을 가진 "샤알(שׁאל = to enquire, to demand, to ask)"이라는 동사가 그 뿌리이다.
유다의 첫째 아들인 "엘(= watchful)"은 유다가 그 이름을 지었고 둘째 아들인 "오난(=strong)"은 누가 지었는지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세째 아들은 유다의 아내가 "셀라"라는 이름을 지었다.
Genesis 38:3
And she conceived and bore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r.
Genesis 38:4
And she conceived again and bore a son and called his name Onan.
Genesis 38:5
And she continued still and bore a son. And she called his name Shelah. And he was at Chezib when she bore him.
유다의 아내가 셀라를 낳을 때 유다는 거십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유다의 모든 가족이 그 당시 거십에 살았다는 말일 수도 있고 유다만 거십에 있었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세째의 이름을 유다의 아내가 지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유다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슨 이유였든지 간에 유다는 가족과 떨어져 거십에 있었고 그의 아내는 (아둘람 지역에서) 남편의 부재 가운데 세째를 출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거십으로 갔을까? 거십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왜 그는 출산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십에 그대로 머물렀을까? 자기 셋째의 출생보다 더 중요한 일이 거십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도단에서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한 그는 그 죄책감 때문에 헤브론에 있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 아둘람으로 왔다.
혹시 그는 비슷한 이유 때문에 아둘람에서 거십으로 간 것은 아닐까?
그는 자신의 실수를 직면하고 현실을 직면하고 살기가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아둘람(עדלּם = justice of the people)으로 왔지만 거기서 현실을 피해 거십으로 간 것은 아닐까?
(농담: 아둘람은 "아~ 둘~낳음"이라는 발음처럼 들린다. 그래서 유다는 아둘람에서 아들 둘을 낳은 뒤 거십으로 옮긴 것이 아닐까?^^)
거 십이라는 히브리어는 "케찌브(כּזיב = falsified)"라는 단어로 "거짓된"이라는 뜻이고 "거짓말 하다" "속이다" "헛되다"는 동사인 "카짜브(כּזב = to lie, to deceive, to be in vain)"가 그 뿌리이다.
이처럼 거십이라는 곳은 아마도 그 이름처럼 거짓과 속임이 판치며 허무(vain)가 판치는 곳이 아니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현실을 직면하고 부딪히며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현실을 피해 다니며 가상현실(surreal) 속에 살아간다.
컴퓨터 게임이 그렇고 마약이나 알코올이 그렇다. 이러한 것들은 한동안 우리를 현실의 압박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가상현실을 누리게 한다.
하지만 게임이 끝나고 술이나 마약 기운이 떨어지면 더 깊은 허탈감과 두려움이 올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이상이 오게 되고 그것을 잊기 위해 또 다시 가상현실 속으로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다.
유다는 아둘람에서 한동안 자신의 과거를 잊고 아들 둘을 낳을 때까지는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엘(=깨어 있는)"이라는 이름과 "오난(=강한)"이라는 이름을 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세째가 더해지면서 그에게 침체나 부담감, 두려움이 몰려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거십으로 피하면 한동안은 잊어 버릴 수 있지만, 물귀신처럼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 다니며 죄책감이나 정죄감으로 괴롭힌다.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요 반석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디에도 궁극적인 해결은 없다. 일시적인 마취나 가상현실은 우리를 더 깊은 정죄감과 침체 속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은 우리를 자유케 하며 현실을 직면케 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허황된 종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케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한 순간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즉 음식을 만든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그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자동차를 만들고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결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집을 지은 사람이나 그 집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 집이 무너질까봐 불안해서 그 집에서 살 수 없다.
믿음은 우리에게 현실을 피해가지 않고 직면하게 한다.
하지만 원수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속이고 믿음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 뒤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앗아가고 생명을 앗아간다.
트로이의 목마를 본 트로이 시민들은 승리에 취해 그들의 원수에게 완전히 속고 말았다. 즉 그들은 목마는 보았으나 그 안에 있는 원수는 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트로이의 목마도 실재하는 것이었지만 그 목마 안에 있는 군인들도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실재하는 것이었다.
원수는 눈에 보이는 목마를 통해서 실재하는 군인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숨긴 뒤 승리감에 만취한 사람들을 동원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원수를 안전하게(?) 트로이 성으로 들어가게 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만약 내가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나도 트로이 목마와 함께 가상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원수를 내 삶으로 초대하게 될 것이다.
하 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전적으로 매달리거나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하나님과 그가 이미 창세 전에 준비해 놓으신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찾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화려한 가상현실이 있는 거십을 찾아가기 보다 비참해 보이는 갈보리를 찾아가자.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지만 그 안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 재정 때문에 하나님 앞에 혼자 무릎으로 나아갔다. 이스라엘에 함께 가는 형제의 항공료와 우리 가정의 재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은행계좌를 열어 보았는데 재정이 플러스였고 형제의 비행기표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리고 오전에 내가 아는 어떤 분이 문자를 보내어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셨다. (That's really unusuall!) 그 분은 내가 알고 있는 분이지만 우리 집에 자주 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신 그 분은 이스라엘 여정에 보태라고 하시며 600 유로를 주고 가셨다.
믿음은 가상현실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Hebrews 11:1
Now faith is the substantiation of things having been hoped, the evidence of things not having been s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