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11. Thursday, Genesis 37:35

 2016. 02. 11. Thursday

Genesis 37:35
And all his sons and all his daughters rose up to comfort him. And he refused to be comforted, and said, I will go down to Sheol mourning for my son. And his father wept for him. 


위로(comfort)는 위로부터(from above) 와야 한다. 아래로부터 오는 위로는 위로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마음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우리 노아나 요한이가 엄마 아빠를 말로 위로해 주려고 한다면 우습지 않을까?

위로는 그동안 함께 했던 사람이나 그동안 소유했던 어떤 것을 잃게 되었을 때 오는 상실감을 말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 주거나 감싸고 보듬어 주는 것이다.


사라가 죽었을 때 엄청난 상실감이 이삭에게 왔지만 리브가가 그 인생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삭은 위로를 받게 된다.

Genesis 24:67
And Isaac brought her into the tent of his mother Sarah. And he took Rebekah, and she became his wife; and he loved her. And Isaac was comforted after his mother.

유다는 자기 아내가 죽은 뒤에 위로를 받긴 했지만 그 육체적인 공백 때문에 양털 깍으러 가는 길에 나타난 창녀처럼 꾸민 며느리와 잠자리를 하게 된다.

Genesis 38:12
And the days were many, and the wife of Judah, the daughter of Shuah, died. And Judah was comforted, and he went up to the shearers of his flocks, he and his friend Hirah of Adullam, to Timnah. 


다윗이 바세바를 취한 뒤 낳은 첫 아이가 죽고 난 뒤 다윗은 바세바를 위로했고 그녀에게 들어가 잠자리를 한다. 그리고 바세바의 두번째 아이인 솔로몬이 태어나고 그를 통해 바세바는 제대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2 Samuel 12:24
And David comforted his wife Bathsheba. And he went into her, and lay with her. And she bore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Solomon. And Jehovah loved him,


이처럼 위로해 주고 그 위로로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있고 다른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사람에게는 있다.

한국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밥을 먹지 않으면 식사를 한 것 같지 않다고 말하며 영국 사람들은 후식(디저트)를 먹지 않으면 식사를 한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쌀로 채워야만 하는 위장이 띠로 있고 영국 사람들은 후식으로 채워야만 하는 위장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어떤면에서 이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입어도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오셔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기쁘게 만족하며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갖고 있고 유명한 사람들일수록 그것을 잃지 않고 지키려고 노심초사 하기 때문에 더 불안하고 걱정과 근심이 많다고 한다.

하 지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그 분을 제대로 모시고 살아가면 나의 유명세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더 이상 나의 이름이나 위치, 소유를 잃거나 망칠까 봐 불안하게 살아갈 이유가 없게 된다.


 
요셉이 가나안에서 사라지고 난 뒤, 요셉이 죽었다고 확신한 야곱은 슬픔과 비통함 가운데 빠진다.

이것을 본 야곱의 "모든" 아들들과 딸들이 일어나 위로하지만 그는 그들의 위로를 거절하고 애통하며 아들이 내려간 스올(무덤)로 가겠다고 한다.

이처럼 야곱에게는 나머지 아들과 딸들을 다 합치고 이웃 집에서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빌려와서 몇 트럭을 갖고 와도 이미 사라진 요셉 "한 사람"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감정적으로 너무나 깊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요셉이 다른 형제들 앞에서 시금방지게 굴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도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요셉에게 있어서 야곱도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둘의 사라짐은 서로에게 그 인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을 팔았던 형제들의 위로는 위선적인 위로였다. 이것은 마치 가롯 유다가 감람산에 나타나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는 것과 같다.

즉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의 입맞춤은 친밀함의 표현이 아니라 "배신의 극치"였고 요셉을 판 형제들의 위로는 "위선의 극치"였다.

이처럼 우리의 감정은 눈물과 웃음 사이를 오가고 배신과 친밀감 사이를 오가면서 나를 속이고 상대방을 속인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죽은 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행한 짓" 때문이 아니라 요셉에게 지금 "하지 않은 것(회개)" 때문에 사람을 요셉에게 보내어 거짓 메세지를 전한다.

그리고 본인들도 나중에 나타나 요셉 앞에서 자신들을 요셉의 종이라고 말한다.

Genesis 50:17
Your father commanded before his death, saying, So you shall say to Joseph, Please lift up now the rebellion of your brothers, and their sin; for they did evil to you. And now please lift up the rebellion of the servants of the God of your father. And Joseph wept when they spoke to him. 

하지만 이미 감옥에서 형들을 용서하고 잊은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보살피겠다고 약속한다.

Genesis 50:18-19, 21
18 his brothers also went and fell down before his face. And they said, Behold, we are your servants. 19 And Joseph said to them, Do not fear. For am I in the place of God? 21And now do not fear; I will nourish you and your little ones. And he comforted them, and spoke to their hearts.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그의 은혜와 진리를 경험한 사람, 그리고 그것을 맛보고 사는 사람은 과거에 매여 살 수도 없고 지금 해야 할 것을 내일로 미루고 덮어버린 채 살아갈 수도 없다.

요셉은 형들의 과거를 이미 용서하고 잊었으며 하나님의 영원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형들은 회개하지 않은 과거 때문에 계속해서 과거에 묶인 채 죄책감의 노예와 죄의 종으로 살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한 것에 묶여서 자유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내가 지금 현재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자유하지 못하며 예수님이 이미 영원 속에서 행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한 것이다.

위선적인 위로가 먹힐까? 위선적인 회개가 먹힐까? 위선적인 용서가 먹힐까? 위선적인 거룩(separation)이 먹힐까?

사람들은 위선으로 속일 수 있지만 계속해서 속일 수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위선 앞에 속지 않는다.

만약 내가 위선으로 살아간다면 나는 스스로를 거짓으로 묶고 노예로 만들며 진실이 드러날 것에 대해서 늘 두려워 하며 살게 될 것이다.

진실과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

John 8:32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