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25. Monday, Genesis 37:20

 

2016. 01. 25. Monday

Genesis 37:20
And, Come now, and let us kill him, and throw him into one of the pits. And let us say, An evil beast has eaten him. And let us see what will become of his dreams.  
 

형들은 요셉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사실 요셉의 꿈을 그냥 주변에서 지켜 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꿈이 구체적으로 이루어 지는데 놀라운 역할을 한다.

이처럼 내 주변에서 요셉의 형들처람 비웃고 조롱하며 심지어는 그 꿈이나 부르심을 묻어 버리고 파괴해 버리기 위해서 나를 죽이려 하며 노예로 팔아버리지만 그것이 그 꿈을 이루는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그 "끝"은 실제로 요셉의 인생에 새로운 "시작"을 갖고 왔다.

사탄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이 땅에 전혀 새로운 역사의 시작과 완성을 가져 왔다.

즉 요셉의 형들이나 사탄은 끝을 기대하고 그 일을 진행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그 끝은 오히려 전혀 새로운 시작을 갖고 왔다.


결혼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바닥났다는 것은 아름답게 시작된 잔치를 망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가나(Cana) 결혼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바닥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첫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의 공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병을 앓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것은 치유를 기대했던 그들의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죽음은 끝이 아니었고 그 죽음 때문에 "치유"가 아닌 전혀 새로운 시작인 "부활"을 경험케 된다.

죽어가는 나사로의 치유를 위해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냈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그가 죽고 난 뒤에 나사로의 동네에 나타나신다.

이미 무덤에 묻힌지 4일이나 지난 나사로의 인생은 이 땅에서 완전히 끝나 버렸을 뿐 아니라 이미 냄새나고 부패해져 소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히 끝나버린 인생을 찾아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전혀 다른 차원의 시작인 부활을 주셨다.


내 인생이 끝나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시작이란 오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끝은 결코 끝으로 끝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시작을 갖고 온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힘들게 하고 끝나게 하는 원수같은 존재가 없다면 내 인생은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 안에서 신나게 맴돌며 반복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내가 죽어도 하나님의 꿈은 죽지 않고 결국은 이루어 지고 만다. 아니,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꿈을 내 힘과 능력으로 이루려고 하거나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그랬다. 그는 위로부터 주어진 계시적인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고 자신을 위해서 이루려고 금신상을 만들어 절하게 했다.

Daniel 3:1
Nebuchadnezzar the king made an image of gold whose height was sixty cubits; its breadth, six cubits. He set it up in the plain of Dura, in the province of Babylon.  


나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을 갖고 온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막상 그 끝이 찾아 오게 되면 우리는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그것을 막아 선다. 왜냐하면 우리는 끝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도 무엇을 보다가 "이제 그만 보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떼를 쓰거나 울며 불며 계속 보려고 야단칠 때가 많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는 매일 매일 끝을 내셨고 매일 매일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 그리고 6일째는 모든 것을 끝내시고 안식(שׁבת = to cease, to stop)으로 들어 가셨다.

즉 이 안식은 창조된 모든 만물의 새로운 시작 뿐 아니라 영원한 시작을 열어주고 보여주는 통로가 되었다.


인간이 만든 움직이는 것들은 브레이크(brake)가 있다. 자전거나 자동차는 물론, 심지어 하늘을 나는 비행기나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도 브레이크 장치가 있다.

만약 이러한 브레이크 장치가 없다면 결국은 마구 달리다가 부딪혀 망가지거나 소진되어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바로 "밤과 낮"을 만드셔서 자연 속에 브레이크를 만들어 두셨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안식일(שׁבת = to stop, to cease, to break)"이라는 브레이크 장치를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을 믿는대신 자신의 힘으로 공급하고 보호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정신없이 달리며 살아간다.

아무리 멋있고 잘 달리는 자동차도 브레이크 장치가 허술하거나 듣지 않는다면 사고는 이미 보장되어 있는 것과 같다. 즉 잘 달리는 자동차 일수록 브레이크 장치가 중요하다.


과거 농경생활을 하며 천천히 달리던 때에는 저녁이 되면 촛불이나 호롱불을 켜고 속도를 늦추며 멈추는 것이 쉬웠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같은 터보 엔진에다가 제트 엔진까지 장착한 인생들은 일주일 24시간(24/7)을 정신없이 달리며 멈출 줄 모르고 살아간다.

아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준비해 두신 브레이크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대교나 안식교의 종교 박물관 전시물처럼 여기며 그것을 무시하고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살아가기에 여기 저기서 온갖 사고들이 터지고 있다.

즉 멈추지 않고 쉬지 않기에 개인적으로 몸이 상하는 것은 물론 가정이 깨어지고 사회가 불신과 불안으로 마구 치닫고 있다.


신뢰(trust)가 없으면 쉬지(rest) 못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신뢰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없기에 나 자신이라도 혹사하면서 돈을 벌고 자리를 지켜 나가야 한다.

결국 이런 사람은 불안하기 때문에 쉬지 못하고 자신을 노예처럼 혹사하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몰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브레이크 장치를 매일 매주 사용하며 멈추고 쉬며 살아간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면 속도를 늦추고 멈추고 하루를 끝내고 쉬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루가 제대로 멈춰지고 끝이 나야 새로운 날이 시작될 수 있다.

제 7일이 되면 모든 것을 멈추고 쉬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 누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원이 실제가 되고 나에게 주신 사람들과 자연 만물들과의 관계들이 실제가 된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이 브레이크 장치를 사용해서 멈추게 될 때, 이 참된 쉼은 우리를 시간의 틀이나 일로부터 자유케 하고 하나님이 주신 영원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게 한다.

끝이 나야 새로운 시작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나의 삶이 끝나도록 나를 죽이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그 죽음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고 감사하자.  

끝날 것은 끝나야 새로운 시작이 주어진다. 놓아야 할 것을 붙들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집트로 갈 수가 없고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내 삶의 다음 장(chapter)이 이 땅에 풀어질 수 없다.

보내야 할 것을 보내고 놓아야 할 것을 놓자. 옷도 사람도 돈도 자리도 다 보내자. 그리고 하나님만 붙들자.

영원한 것을 위해, 지금은 아프고 아쉽고 고통스럽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붙들고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