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20. Wednesday, Genesis 37:16

 

2016. 01. 20. Wednesday

Genesis 37:16
So he said, "I am seeking my brothers. Please tell me where they are feeding their flocks."

이 이름없는 한 사람은 요셉이 찾던 사람(형)이 아니었고 요셉이 절박해지기 전까지는 오히려 요셉의 여정을 방해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은 얼마든지 이 사람을 무시하고 계속 형들을 찾아 헤매거나 아버지께 돌아가서 형들을 찾지 못했다고 보고할 수도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든다고 하는 것처럼 형들을 찾지 못하고 들판을 헤매며 방황하던 요셉은 이 이름없는 사람의 질문에 반응했고 그가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차라리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요셉은 죽음의 웅덩이를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노예로 팔려가지도 않고 곧장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목자로서의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밤새 갈릴리 호수를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찾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때 한 무명의 청년이 나타나 배를 좀 빌리기를 요구하며 베드로의 여정을 방해한다.

만약 읍장이나 군수, 면장이나 반장이라도 되는 사람이 나타나 배를 빌리자고 했으면 모를까 이름없는 한 목수가 배를 빌리자고 했을 때 베드로는 불쾌하고 짜증이 났거나 화가 나지 않았을까?


엄청난 기근 중에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과부에게 엘리야가 나타나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좀 달라고 했다.

엘리야는 정말로 눈치도 없는 사람이었을까? 이 절박한 기근중에 그래도 용케 버티다가 이제 아들과 함께 남은 마지막 음식을 먹고 인생을 끝내려던 과부에게 염치없이 빵과 물을 요청하며 그 죽음의 전주곡을 기분 나쁘게 깨뜨린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도 그랬고 이제 밀가루 한 줌과 기름 얼마 밖에 남지 않은 이 과부의 인생도 절망과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해꾼이 나타나 도움을 받아야 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기대를 망치고 기분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움을 요청했던 그 사람때문에 그들은 기적을 경험했고 오히려 도움을 받게 되었으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게 된다.


하지만 요셉은 그 절박한 가운데 만난 그 이름없는 사람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던 그의 행복했던 삶이 끝장나고 노예로 팔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약 요셉이 이 무명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났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는 헤브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지금까지의 행복했던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고 행복한 목자로서 인생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 이름없는 한 사람 때문에 도단까지 가게 되었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망의 골짜기를 경험하며 정체성의 혼란과 관계의 깨어짐을 경험하고 상상도 못했던 노예가 되어 이집트까지 끌려 갔으며 히브리 노예가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이 나라로 잉태되는 밑거름이 된다.

내 인생을 방해하고 흔들고 망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그 다람쥐 쳇바퀴에서 끄집어 내어주는 구원자이기 때문이며 내 삶을 거기서 상상도 못한 곳으로 이끌어 가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문을 열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를 죽이고자 하는 형제들도 그렇다. 나를 막고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내가 살아온 그 삶의 테두리와 변두리를 결코 스스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작년 10월, 더포지 대장간 믿음학교가 있기 이전에도 많은 도전과 변화들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 주어진 변화는 차라리 급진적(radical)인 변화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그로인해 내 안에, 그리고 더포지 공동체 안에 여러 변화들이 있다. 그래서 불편하고 불안한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형제 자매들을 더 신뢰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나에게 더 공간이 생겨서 김사하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내어주고 잃어버리는 것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멀리가고 더 높이 오르기 위해서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현대를 분주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잃어버려야 하는지도 모른채 정신없이 살아간다.

즉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찾으려는 생각없이 반복적인 삶을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려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잃어버려야 할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죽음도 불사하고 싸우며 살아간다.


요셉은 형제들을 찾기 위해 세겜으로 갔으나 도단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린다.

즉 그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입혀준 특별한 옷에 둘러싸인 채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나 도단에서 그 옷을 다 벗기우고 노예라는 벗기운 정체성을 덧입고 이집트로 끌려간다.

만약 내가 나를 잃어 버리지 않고 형들을 찾으려고만 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나의 궁극적인 정체성과 궁극적인 데스티니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한 것이 은혜이고 내가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을 벗기우고 나를 잃어 버리는 것이 은혜이며 축복이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실 때 자기 자신을 다 비우고 오셨고 마지막에는 입고 있던 속옷까지 다 벗기우고 아버지로부터도 단절되는, 자신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을 경험하셨다.

Matthew 16:24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desires to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let him bear his cross, and let him follow Me.  

문제는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답과 궁극적인 답을 내 인생에 갖고 온다.

즉 문제가 주어진 것은 답 자체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나를 찾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이 없는 인생이란 노예살이와 같은 것이며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거세 당한(castrated) 내시(eunuch)의 삶과 다를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