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13. Wednesday, Genesis 37:10

 

2016. 01. 13. Wednesday

Genesis 37:10
So he told it to his father and his brothers; and his father rebuked him and said to him, "What is this dream that you have dreamed? Shall your mother and I and your brothers indeed come to bow down to the earth before you?"

요셉이 처음 꾼 볏단의 꿈에는 요셉의 형제들 11명과 요셉만 등장했고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만 자기 꿈을 말했다.

그리고 요셉이 두 번째로 꾼 꿈에는 야곱의 아들들 뿐만 아니라 해와 달도 등장함으로써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에게만 이 꿈에 대해서 말한다.

왜 그는 레아나 빌하, 실바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일까?

요셉의 친어머니 라헬은 이미 이 땅을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인 레아나 빌하, 실바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일까?  

왜 요셉의 꿈 속에는 아들 형제들만 나타나고 딸들은 없는 것일까? 야곱에게는 적어도 레아를 통해서 태어난 디나(Dinah)라는 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요셉의 꿈 속에 등장하지 않았을까?

디나는 세겜에서 강간을 당하고 난 뒤 무대 뒤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도 요셉이 살던 그 당시의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를 고려해서 꿈을 보내신 것인가?

(만약 라헬이 살아 있었다면 요셉은 당연히 자기 어머니에게로 달려 가서 자기 꿈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이처럼 내가 존재하지만 여자라는 것 때문에 요셉으로부터도 무시 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 당한 것 같다. 즉 자기 존재의 상실감이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처럼 내가 존재하지만 문화적(culturally), 감정적(emotionally), 재정적(financially), 상황적(situationally), 조건적(conditionally)인 이유 때문에 무시 당하거나 외면 당할 수 있다.

즉 내가 존재하지만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강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언어가 서툴다는 것 때문에, 키가 작다는 것 때문에, 뚱뚱하다는 것 때문에, 경험이 없다는 것 때문에 무시 당하고 외면 당하지는 않는가?

내가 존재하지만 같은 지역 출신이 아니고 같은 교단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같은 단체가 아니고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같은 색깔이 아니고 같은 또래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무시 당하고 외면 당해 본 적이 없는가? (있다.)

아니면 반대로 내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외면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다. 비록 사람들이나 사회가 나를 무시하고 거절하며 심지어 죽는 자리로 끌고 간다고 해도 내가 오늘 이 땅에 존재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내가 만약 그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가 인정하고 높혀 줄 때는 우쭐해 하겠지만 거절하고 외면할 때는 기가 죽고 낙심하며 좌절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다면 비록 주변에서 나를 거절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핍박과 죽음이 온다고 해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지만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거절 당하시고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건축자의 버린 돌이신 예수님은 결국 모퉁이돌이 되셔서 이 땅에 당신의 몸이신 교회를 세우시며 영원히 멸망치 않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비록 체포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만류나 회유에 흔들리지 않고 그 부르심을 향해 끝까지 달려갔다.  

비록 돌에 맞아 죽을 뻔 하고 풍랑에 밀려 파선하기도 했지만 그는 사람이나 상황에 동요되지 읺고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을 놓치지 않았으며 끝까지 하나님께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며 달려갔다.


나는 나를 지난 16년 동안 이 웨일즈 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잘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에 의해 동요되지도 말고 내면의 감정에 동요되어서도 안된다. 리즈 하월즈의 영적 유업을 이어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늘 브리짙과 노아, 요한이를 비롯해서 집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로서터라는 잉글랜드의 한 지역을 중보하기 위해 1박 2일로 방문한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이후 다른 지역에 대한 마음을 갖고 이렇게 중보하기 위해 전체 공동체가 움직이기는 처음인 것 같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한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야곱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들이 아들이며 동생인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철부지) 요셉을 꾸짖는다.

자연스런 인간 관계의 순서로 볼 때 야곱의 말이 맞다. 하지만 22년 뒤에 요셉이 말한 것이 이집트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진다.

자연적인 순서나 질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순서대로 한 세대 전에 이버지와 어머니를 보내셨고 먼저 형들을 요셉보다 앞서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순서를 만드셨기에 자연적인 순서나 질서를 유지하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적인 순서나 질서를 넘어 초자연적로 역사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연습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연적인 순서나 질서 안에서만 살게 될 것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나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간 것, 모든 기적적인 치유나 오병이어의 기적 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들이다.

요셉을 자연적인 순서를 따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 순서를 바꿀 수 있는 분이 아니신가?

그래서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고 누구든지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자연적인 순서와 질서를 뛰어 넘고 역행하는 초자연적인 이상한 나라이다.

야곱의 생각에는 요셉이 말하는 꿈은 꿈과 같은 이야기로 들렸지만 하나님의 손이 임하면 순서가 바뀌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호수아의 기도는 태양과 달을 거의 하루동안 멈추게 했으며 히스기야의 간청은 해를 뒤로 물러가게 했다.

에서가 먼저 태어 났지만 나중에 태어난 야곱이 장자권을 이어 받는다. 르우벤이 장자로 태어 났으나 네 번째로 태어난 유다가, 그리고 11번째로 태어난 요셉이 그 장자의 유업을 받는다.

나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연적인 순서나 질서 안에 갇혀 있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로 사는 것에 익숙해 있다.

하나님께 들으면 이것이 달라진다.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면 이 자연적인 순서와 조건이 달라진다.

나는 자연적인 순서와 권위에 잡혀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경험하고 그 통로가 되어 이 땅에 가져오는 삶을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