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23. Tuesday, Genesis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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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2. 23. Tuesday

Genesis 38:9
And Onan knew that the seed would not be his. And it happened when he went into his brother's wife, he wasted his semen to the ground, not giving seed to his brother. 

오난은 그의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ידע = to know, to acknowledge). 그래서 그는 형수와 잠자리를 할 때 결정적인 순간 땅에 사정(ejaculate)을 해 버린다.

만약 그가 그렇게 계산에 빠르지 않고 오히려 무디었다면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아는 것이 병이 되고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가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꼬치 꼬치 따지고 캐묻고 물고 늘어지면 결국 그것 때문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내가 죽게 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한 경험이나 계산을 통해 알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계산을 무시하거나 그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갈릴리에서 태어나 거기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수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사렛 목수출신 청년 예수의 말을 듣고 상식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죽인 채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다.

베드로는 이것을 통해 지금까지 자기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만약 베드로가 자기의 경험과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었던 것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른 채 행복한 어부로 그 인생을 갈릴리에서 마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아는 것을 내려 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상상치도 못한 데스티니를 향해 갈릴리를 떠나게 된다.

Luke 5:5
And answering, Simon said to Him, Master, laboring all through the night we took nothing. But at Your word I will let down the net. 


그러 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듣고 그 들은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왔고 알고 있는 그 경험과 상식의 한계 안에 갇힌 채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준비해 놓으신 우리의 영원한 정체성과 영원한 데스티니를 모르고 그 한계 안에서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을 때 계산이 빠르고 논리적이었던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낭비한다고 나무란다.

John 12:5
Why was this ointment not sold for three hundred denarii and given to the poor? 

하지만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알고 있는 계산을 넘어 영원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데 자신의 남은 삶의 모든 것을 드린 마리아를 칭찬하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행한 것이 전해질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계산에 너무 빠르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이 땅에서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영원 속에 있는 계획을 놓치거나 망치는데 일익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오 난은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과 전통 때문에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두고 결국은 죽음을 맞게 된다. 만약 오난이 그 씨앗(정액)을 땅에 쏟지 않았다면 그 씨앗을 통해 다윗이 태어나고 메시아가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형의 이름이 드러났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오난은 "아는 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망쳤지만 유다는 "모르는 것" 때문에 며느리와 잠자리를 하는 실수를 한다. 하지만 그 실수를 통해서 다윗의 집안을 세우게 된다.

즉 유다는 그 창녀가 자기 며느리인 줄 모르고 창녀로 가장한 다말에게로 들어갔고 그 씨앗이 자기 것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창녀에게 쏟아 버린다.

그런데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창녀에게 뿌린 그 씨가 자기 며느리 몸 속에서 쌍둥이가 되어 태어났다.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육체의 쾌락을 즐기지도 못하고 그 결정적인 순간 땅에 사정해 버린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기적이고 사악한 오난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고 형의 가계을 잇지 못한 것은 물론 그 자신도 죽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도 이 땅에 빛을 보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진다.

하지만 유다는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고 육체의 쾌락을 즐겼을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임신한 자기 며느리를 죽일뻔 했지만 유다가 자신의 마음을 낮추고 모든 수치를 무릅쓰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다윗과 메시아가 그 계보를 통해 태어나게 된다.


우리는 오난처럼 내가 아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막고 나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고, 유다처럼 내가 모르고 행한 것 때문에 나의 인생을 망칠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세워줄 수도 있다.


오난은 살아 있는 자신의 가계를 세우기 원했지 죽은 자기 형의 가계를 세워주기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가계도 망치고 말았다.

그런데 형의 가계를 세우는 것은 곧 자기 아버지의 가계를 세우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 드림으로 무너진 아버지의 가계를 다시 일으키셨고 자신의 가계를 위해 열방에 있는 자신의 신부를 일으키고 계신다. 


나는 나의 가계(교단, 단체, 기업,...)를 세우는데 관심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의 가계를 세우는데 관심을 두고 있는가?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내가 아는 것 때문에 아버지의 가계를 세우는 것이 방해 받고 나에게 죽음을 갖고 올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오늘 나사렛과 갈릴리로 올라간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알아왔던 것을 내려 놓고 주님께 듣고 나아가자. 그리고 형제, 자매를 세우는데 나를 드리자.

만약 내가 나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존재할 때 비로소 관계가 형성되고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

이스라엘 땅에서 시간만 보내고 수평적인 이동만 하며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기 싫다. 하나님의 수직적인 계시가 있고 거기에 수평적인 내 삶이 얽혀져 예수님이 드러나는 의미 있고 의미 깊은 하루를 살고 싶다.

어 제 요단강가에서 참으로 의미 깊은 시간을 가졌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물을 가르고 갑절의 영감을 받기 위해 건넜던 그 곳, 여호수아의 군대가 약속의 땅을 취하기 위해 언약궤로 물을 가르고 마른 땅으로 건넜던 그 곳,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그 곳, 어제 그 곳에서 북한과 남한과 이스라엘이 교차하는 작은 그림을 보았다.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돌아가는 그림과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