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22. Monday, Genesis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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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2. 22. Monday

Genesis 38:8
And Judah said to Onan, "Go in to your brother's wife and marry her, and raise up seed to your brother."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자식없이 죽은 형을 대신해서 형수와 결혼해 형의 자식을 낳아 주고 그 형의 가문이 이어지도록 하는 그 당시 중동의 결혼관습을 따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적으로 보면 유다의 둘째 아들인 오난의 씨가 그 가문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유다의 씨가 그의 가문을 일으킨다.

즉 유다는 "네 형의 아내" 다말에게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나중에 유다 자신이 창녀로 변장한 "자기 아들의 아내" 다말에게로 들어간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위가 결국은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모르는 채 무책임하게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남에게 하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국은 눈덩이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형사취수"라는 관습은 그 당시 중동 지방에서 (형제들 중에 누가 죽었을 때) 형제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행해지는 전통이었으나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한 유다는 죽은 자기 형제의 아내가 아닌 죽은 자기 아들의 아내에게로 들어가서 그 가문을 잇게 했다.


문 화와 전통이란 이렇게 내면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욕구와 옷가지 몇 개, 화장 몇 겹으로 쉽게 무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전통과 문화에 목숨을 걸거나 그 전통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묶어 버리거나 매장해 버린다.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책임이나 역할이 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이나 문화를 핑계로 (아예 엄두도 못내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때가 있다.

유다는 자기 아들 엘을 위해서 며느리 다말을 취했지만 그 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을 그 때문에 잃게 된다.

그리고 자기 아내마저 잃고 난 뒤 자신의 성적욕구를 채우기 위해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에게로 들어간다.

이처럼 내가 나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게 되면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더 많은 희생만 낳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사건 자체를 두고 보면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근친상관이고 불윤이며 성경에서도 금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가 살아 있을 때 그 형제의 아내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도 불윤이며 근친상관의 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형제가 죽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죽은 형제의 형이나 동생은 자식없이 남아 있는 과부를 아내로 취하고 그녀와 잠자리를 해서 형의 가문을 이어가게 해야만 했다.

Deuteronomy 25:5
If brothers live together, and one of them dies, and has no son, the wife of the dead shall not go outside to a strange man; her brother-in-law shall go in to her, and take her to himself for a wife, and shall perform the duty of the levirate; 


이처럼 죽음은 새로운 문화와 관습을 만들며 살았을 때에는 용납이 되지 않거나 불가능했던 것이 용납되고 가능케 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강요 당하게 된다.

언 젠가 본 한 영화에서 한 죄수가 죽음의 감옥을 탈출할 때 죽은 시체와 자신을 맞바꾼 장면이 생각난다. 그는 죽은 자기 동료를 자기 침대에 눕힌 뒤 스스로 시체가 되어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왜냐하면 죽은 시체는 더 이상 그 감옥 안에 있어야 될 이유와 가치가 없고 감옥 밖으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처럼 우리를 자유케 한다. 내가 죽지 않고 나의 계획과 자존심과 문화와 전통을 내세우고 그것을 지키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죽음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신음하며 죽어간다.


유다는 자기 아들들을 통해서 자신의 대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다가 아들들만 죽이게 된다. 하지만 그의 대는 그 아들의 씨가 아닌 그의 씨를 통해 이어진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희생해 주며 그 대를 이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억지로 다른 사람을 나 대신 밀어 넣고 있지는 않는가?


롯(Lot)의 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취하게 함으로써 그 전통과 윤리를 파괴하고 씨를 얻었으나 다말은 자신이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가 지나가는 길목에 기다림으로써 그 씨를 얻게 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그 가족을 이어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수치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짓을 감행한 것이다.

롯(Lot)과 유다는 일시적인 육체의 만족을 때문에 술과 성적유혹에 넘어갔다. 하지만 롯의 딸들과 다말은 그 가문과 미래를 바라보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그 모험을 감행한다.

나는 일시적인 육체적 만족을 위해 내 삶을 무책임하게 내어 던지고 살지는 않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가문과 미래, 그리고 영원을 생각하며 수치와 나의 죽음마저 감수하고 살아가는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다. 그는 처음 아담의 대를 잇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인간이 되어 인간의 몸 속에 오셨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는 소극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모습으로 변장하시고 우리처럼 인간이 되어 오셔서 처음 아담의 대를 잇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벌거 벗기우는 수치와 처절한 고통과 모든 값을 치루셨다.

그것이 바로 보아스를 통해 미리 보여주신 그림이다.

처음 아담은 자신의 일시적인 욕구와 유혹 때문에 룻(Ruth)의 첫번째 기업무를 자가 그 신발을 벗어 던진 것처럼 자신의 책임과 특권을 벗어 던지고 그 열매를 먹었다.

하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모든 수치와 손해를 무릅쓰고 이방 모압 여인 과부 룻(Ruth)을 떠 안은 보아스처럼 그 쓴잔을 마시며 자신의 생명을 값주고 그의 신부인 우리를 떠 안으셨다.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권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전통과 관습 때문에, 아니면 일시적인 유혹과 쾌락 때문에 그것을 벗어 던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겠다.


어제 오후에는 내가 저녁 요리를 해서 지체들(가족)을 섬겨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뭐가 제대로 없어 보였지만 이것 저것 있는대로 해서 부대찌게 비슷한 것을 끓였고 밖에 나갔다가 도착한 지체들과 맛있게 먹었다.

(우리의 일류 요리사인 JS 자매는 나의 요리 솜씨에 밀려 이제 하산해야 하겠다는 말을 한다. 사실 나는 요리조리 피할 줄 모르기 때문에 요리를 한 것 뿐이다.)

전통이나 관습이 판을 치고 엉뚱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내가 스스로 죽지 않기 때문이며 내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엉뚱한 사람을 내 대신 집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전통과 관습을 넘어갈 수 있다. 십자가의 은혜가 그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전통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나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