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17. Wednesday, Genesis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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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2. 17. Wednesday

Genesis 38:4
And she conceived again and bore a son and called his name Onan. 


야곱이 그의 두 아내를 취할 때는 각기 7년씩, 14년 간을 종살이 하며 그들의 몸값을 치룬다. 그런데 유다는 가진 것도 없었을텐데 수아의 딸을 아내로 취한다.

마치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발견되었을 때, 가진 것도 없고 오갈데 없었던 그에게 이드로는 자기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주고 모세를 데릴사위로 맞아 들인다.

아마 도망치듯 집을 나온 유다도 가진 것이 없고 갈 곳도 없었기에 수아가 그를 데릴사위로 맞아 들인 것은 아닐까?


이렇게 내가 가진 것이 없고 갈 곳이 없으면 데릴사위라고 해도 감사할 뿐이다. 그렇기에 데릴사위가 된 사람들은 보통 기를 펴고 살지 못하고 늘 장인의 눈치를 봐야 하고 심지어 자기 아내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처가살이를 하게 되면 모세처럼 말도 제대로 못하고 더듬거리는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유다는 비참한 자기의 신세를 역으로 반영하듯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을 "강하다"는 뜻으로 "오난(אונן = strong)"이라고 지은 것은 아닐까?


유다는 자기 아내가 첫째 아이를 갖고 나서 둘째 아들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결혼한 부부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건강하다면 아이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즉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생명의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둘째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 아들은 첫째와 꼭 같을 수 없다.

즉 겉으로 볼 때는 또 다시(עוד = again) 임신을 해서 이전처럼 입덧을 하고 배가 불러오며 비슷하거나 같은 양상을 보이지만 태어난 아이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즉 생명은 결코 복사(copy)할 수도 없고 복사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복제인간(clone)에 대해서 거론을 하고 실험을 하고 있고 겉으로는 비슷한 모습을 가진 어떤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은 그런식으로 복제되지 않고 복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것들은 수 천, 수 만개로 대량 복사가 가능하고 꼭 같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모 임(meeting, conference, worship service)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이 없는 모임은 이전 모임이나 그 전의 모임처럼 꼭 같이 진행되고 예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을 경험했고 모든 것이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 금 한국에서 JS 자매가 3월에 더포지 코리아 모임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한 번도 없었던 모임이며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모임이다. 그러므로 웨일즈에서와 같은 모습이 아닐 것이며 달라야 하는 것이 맞다.

어 제 특별히 웨일즈에 있는 두 지체들과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하루에 모든 것을 만들지 않고 6일 동안에 걸쳐서 만드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시면서 매일 매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것을 연습하고 제 7일에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그림을 보여 주셨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멈추고 쉬는 것을 전제로 한다. 멈추고 쉼이 없는 삶이란 부지런히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불안한 삶이며 무엇인가에 맞춰 살아가는 수동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삶이다.

생명은 그 자체가 신비이며 그 안에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염색체가 있고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잉태가 되면 그 생명이 자라도록 밖에서 억지로 압력을 가해야 할 필요가 없다. 만약 밖으로부터 어떤 힘이나 영향력을 받게 되면 오히려 유전자가 변이 되는 나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은 각자의 유전자 안에 다양한 모습과 색깔을 담아 두셨고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눈동자와 지문조차 모두 다르다.

하지만 아이가 잉태되어 자라서 태어나는 임신 기간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39주로 거의 같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는 유기체는 그 안에 넣어 주신 DNA로 인해서 결코 반복되지 않는 생명의 역사가 계속해서 반복되며(?) 이어지고 있다.

유다의 첫째 아들의 이름은 엘이었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오난으로 그 이름은 전혀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둘 다 유다의 아들이었고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즉 이들은 다른 이름을 갖고 태어났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악했던 이들의 죽음은 반복처럼 보인다.

그렇다. 하나님께 깨어 있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반응하며 살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함의 굴레 속에서 반복하며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첫장에서 매일 매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를 반복하셨지만 그 반복되는 시간의 틀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로운 것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제 7일에는 창조의 일도 끝나고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의 틀(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조차 사라진 영원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 (제 7일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의 리듬(틀)을 깨뜨리며 생명이 없는 변화들을 수없이 양산하지만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불신과 불평으로 사악한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생의 광야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안식이 그들 앞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리듬을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더 풍성한 생명을 갖고 오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한다.

즉 저녁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밤에 쉬며 제 7일이 되면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루 동안 쉬며 소홀했던 관계를 세우고 누리는 것이다.

(쉼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누워 뒹구는 게으름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관계 속에서 즐기며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만들고 얻는다고 해도 그 생명의 리듬을 깨뜨리고 멈추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결국은 소진되고 굳어진 채 사악한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나는 때로 누군가 이전에 했던 그대로 꼭 같이 해야한다는 것 때문에 부담이 없는가?

만약 내가 하나님의 창조적인 생명의 리듬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처럼 그 생명의 리듬 안에서 매일 매일 신나게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보다 앞서간 사람의 것을 복사하느라 생명의 리듬도 무시한 채 밤잠을 설치면서 정신없이 살게 될 것이다.

달리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일하는 것보다 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고 난 뒤 일하기 전에 쉼을 먼저 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제대로 멈추지 않는다면 사고로 얼룩진 삶을 살거나 깨어지고 결국은 소진되며 목숨조차 잃게 될 것이다.


* 히브리어에서 안식일이라는 말은 "샤밧(שׁבּת = to cease, to stop)"이라는 단어로 "멈춘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엔진과 디자인을 갖고 있어도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는 고물 자동차보다 훨씬 못하다. 왜냐하면 교통사고가 이미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동차는 전시용으로 세워두기에는 좋지만 짐이나 사람을 싣고 달렸다가는 끝내주는 살인무기가 된다. 즉 자기 자신도 끝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피해와 죽음을 갖고 오게 된다.

우 리 가정과 사회가 겉으로는 화려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속으로 병들고 부서진 것은 결국 멈추는 브레이크가 없이 살아 왔거나 그것이 있어도 형식적으로 붙어 있고 고장이 났거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정신없이 달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멈추는 것을 배워야 한다. 멈추고 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소진되고 다 타버린 뒤에 나자빠져서 뒹구는 삶이나 게으런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리듬을 따라 멈추고 달리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이것을 연습하고 살려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엄청난 댓가를 치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Hebrews 4:11
Let us, therefore,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at rest, so that no one will fall by following their example of disobed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