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29. Friday, Genesis 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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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1. 29. Friday

Genesis 37:24
And they took him and threw him into the pit, the pit being empty, no water in it.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잡아 물이 없고 비어 있는 그 우물(웅덩이)에 던진다.

만약 그 웅덩이에 물이 있었다면 거기에 던져진 요셉은 익사했을 것이고 물은 없지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면 요셉을 거기에 던져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이 없고 비어 있는 우물이란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의 꿈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 땅이 혼란(formlessness)과 공허(emptiness)로 충만했고 어둠(darkness)으로 완전히 뒤덮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공간이 있었고 창조된 것들이 자리할 넉넉한 공간이 있었다.

만약 그 때 땅과 하늘이 소음(noise)으로 가득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해도 그 어떤 것도 그 말씀에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적인(creative) 시작에는 어둠과 혼돈 뿐 아니라 침묵과 비어 있는 넉넉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잘 짜여진 틀에 갇힌채 손에 잡히는 놀라운 것들로 인해 소리치며 분주하게 반복적인(repetitive)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이신 자신을 비우시고(פּשׁט) 종으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스스로 인간 마리아의 몸 속에 종속되어 오셨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시지 않고 오셨다면 과연 모든 인류를 받아들이고 품으며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질 수 있었을까?


요셉을 받아 주었던 우물이 "비어 있었다(empty)"라고 했는데 이 히브리어는 "레크(רק = empty, worthless, vain)라는 말로 "비어 있는" "가치없는" "헛된" 등의 뜻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비웠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샤트(פּשׁט = to spread out, to strip)"라는 말로 "흩어 버리다" "벗기다"는 뜻을 갖고 있고 이 말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옷을 벗길 때 시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므로 형들의 손에 의해 아버지가 입혀 준 옷을 벗기우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된 요셉을 받아 주고 품어 주었던 비어 있던 "그 우물"은, 마치 겉옷과 속옷을 벗기우셨을 뿐 아니라 이미 하나님됨을 스스로 벗으시고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받아 준 그 부자의 "빈 무덤"과 같아 보인다.

즉 이 비어 있고 물이 없는 우물과 부자의 빈 무덤은 이미 그 겉옷과 속옷을 내어 주고 (빼앗기고) 자기 자신까지 내어 준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음 장(chapter)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의 옷과 자리에 묶여 결코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땅인 이집트로 가지 않을 것이고 이집트의 총리가 될 수도 없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십리까지 동행할 수 있는 사람, 겉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내어 주는 사람, 오른쪽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쪽 뺨까지 내어 주는 사람, 그리고 간도 쓸개도 다 내어 주고 속이 텅 빈 것 같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통로로 요셉의 우물이나 예수님의 무덤처럼 사용될 수 있다.


다윗은 정말로 속이 텅 비어 있었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쫓아 다니던 사울 왕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기회가 주어졌지만 바보처럼 그를 살려준다.

그가 속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의 아기스 왕 앞에서도 침을 흘리며 미친척 할 수 있었고 자기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다윗은 속이 텅빈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랬기에 아둘람을 찾아온 그의 부모와 형들을 받아 주고 빚지고 상하고 원통한 사람들 400명까지 받아 준 것이다. (삼상 22:1-2)

지금 그 자신도 쫓겨 다니는 상황에서 자기를 거절하고 내쫓았던 부모와 형들을 받아 주고 400명의 떠돌이 잡류들을 받아준다는 것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전처럼 보인다.

"내 코도 석 자인데... "

이것이 믿음의 도전이다.

속이 비고 속이 없는 바보가 되지 않으면 결코 믿음의 여정을 할 수 없고 미래의 용사들을 받아주고 길러낼 수 없다.


원수는 어떻게 하든지 내 속에 빈 곳이 없도록 온갖 것으로 채우게 유혹한다. 뭔가 빈 곳이 있으면 멍해 보이고 허술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기 때문이다.

원수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흙으로 메웠지만 이삭은 그것들을 다시 파 내고 회복한다. 이렇게 우물에 공간이 없으면 물이 차 오를 틈이 없다.

원래 우물이란 주변에 있는 땅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땅이다. 하지만 흙을 파 내고 돟을 파 냄으로써 생긴 공간이며 거기에 물이 차 오르게 된다.

나의 삶에도 이렇게 파 내고 뽑아내고 걷어낸 공간이 없다면 물이 차 오를 수 없을 것이고 메마른 공간이 없다면 요셉이나 예수님 같은 이를 받아 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도 이 때문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제 7일 째를 텅빈 공간으로 만들어 두셨다. 그 공간에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쫓기며 해야 될 일도 없으며 오직 우리가 쉬고 누리도록 그 공간과 영원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 공간과 영원을 일과 엉뚱한 것으로 채우고 메꾸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좀 비어 있는 사람 같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창조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비워 두신 제 7일을 일과 엉뚱한 것으로 채워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흩어야 될 것들과 벗겨야 될 것들, 파 내고 버려야 할 것들을 아낌없이 던져 버리자. 그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든지 아낌없이 보내어 버리자.

그렇지 않으면 비스타(Vista)를 장착한 나의 옛날 컴퓨터처럼 꽉 차버린 상태에서 무겁게 굳어버린(frozen)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