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7. Sunday, Genesis 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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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27. Sunday

Genesis 36:38
When Saul died, Baal-Hanan the son of Achbor reigned in his place.

사울(שׁאוּל)이라는 말의 뿌리가 되는 동사는 "샤알(שׁאל = to enquire, to request, to ask, to demand)"이라는 말로서 "질문하다" "요구하다" "부탁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사울(שׁאוּל = asked, 부탁받다, 질문받다)이 죽었다는 것은 부탁 받거나 질문 받는 것이 사라졌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귀찮게 하던 것이 사라졌으므로 삶이 평안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이 없고 부탁이 없는 삶이란 수동적이고 비참한 삶이며 죽은 삶이다.

사람들이 부탁이나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그러한 것을 들어 줄 능력(ability)이 없든지, 나에게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relationship)가 없거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부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절박하면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말이 있다.

지푸라기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줄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절박함과 다급함 때문에 닥치는대로 아무 것이나 붙잡는다는 말이다.

귀신들린 딸을 두었던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고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예수님에게 그녀의 딸을 고쳐줄 능력이 있음을 알았기에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 절박함으로 마구 밀고 들어와 요청한 것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내가 아무리 요청해도 그것을 들어 줄 수 없다. 하지만 그 요청한 것을 들어 줄 능력이 있고 그 상황이 다급해도 답이 없는 것은 그 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사로가 죽어 갈 때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속히 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을 듣고도 일부러 계시던 곳에 더 지체하시면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흘이나 지난 뒤에 나타나신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너무나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이들의 관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오시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가 깨어졌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혹시 그 당시에 예수님의 능력이 형편없이 떨어졌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능력이 회복될 때까지 몇 일을 기다리는 중에 나사로가 죽은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칠 때, 왜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그를 구원해 주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서 그들의 관계가 멀어졌거나 깨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당신의 어떤 의도 때문에 침묵하신 것일까?


때로는 내가 부탁하거나 질문한 답이 주어지지 않고 침묵만이 흐른다고 해도 그 하나님의 침묵이 답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너무 조급하게 답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때로는 정말로 내가 얻어야 할 답도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답도 아닌 엉뚱한 것을 답으로 취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침묵의 시간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일까? 사라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내어줌으로써 한 아들이 태어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약속의 아들은 아니었다.

이렇게 밖(위)에서 답이 주어지지 않을 때는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요셉이 술관원장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감옥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만 2년 동안 침묵만이 흐른다.

이러한 침묵 속에서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 했고 결국은 노예로 팔았던 형들과 억울하게 강간 미수의 누명을 씌운 보디발의 아내와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체면 때문에 요셉을 감옥에 넣은 보디발, 그리고 요셉을 구해 주지 않은 술관원장을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이유(답)를 찾게 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오는 생명이 있는 답이란 하루 아침에 공장에서 찍어 내듯이 나올 수 없다.

인형이나 장난감은 공장에서 하루 아침에 나올 수도 있고 수도 없이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진짜 생명이란 건강한 관계 속에서 잉태되고 만 9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태어나게 된다.

우리는 공장에서 나온 인형같이 틀에 박힌 같은 답을 갖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주변 사람들과 다른 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이상하게 보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께 질문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을 따라서 판에 박힌 삶을 프로그램 된 기계처럼, 아니면 노예처럼 살아간다.  
 

질문이 없는 삶이란 정체되고 더 이상 성장이 없는 삶이다. 질문이 없는 삶이란 얕은 형식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겉도는 삶을 살게 한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로부터 질문이나 요구를 받지 않는다면 나홀로 조용한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내 삶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없이 홀로 떨어진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질문은 우리의 관계를 깊게 하고 나를 자라가게 한다. 그러므로 질문이 없는 삶이란 죽은 것과 같고 노예와 같은 삶이다.

노예는 질문하면 안된다. 그저 주인이 시키는대로 듣고 순종하면 된다. 만약 노예가 주인에게 질문을 했다가는 회초리나 따귀가 날아올 것이다.

우리 둘째 아들 (세례) 요한이는 질문이 너무 많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래서 때로는 귀찮기도 하지만 질문없이 수동적으로 맹종하는 아이들보다는 훨씬 생명력 있게 자란다.


우리는 종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 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요일 2:27)

1 John 2:27
But the anointing which you have received from Him abides in you, and you do not need that anyone teach you; but as the same anointing teaches you concerning all things, and is true, and is not a lie, and just as it has taught you, you will abide in Him.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가르침만 따라서 맹종하며 살아야 될 이유도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바쁜 삶을 핑계로 그 분 발치에 앉아서 그 분께 묻고 듣기 보다 이미 다 만들어진 패스 푸드(fast food)나 프로즌 푸드(frozen food) 같은 인스탄트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분주하게 살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하며 질문하고 살아갈 뇌를 주셨다. 그러므로 생각없이 질문없이 맹종, 맹신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하고 판단하되 상황이나 사람들의 주장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그 분을 신뢰함으로 그 분께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다.

의심없이 질문없이 사는 것이 좋은 믿음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이미 종교적으로 쇄뇌 당했기 때문에 맹신하고 맹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제자들에게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 주셨다.

의심한다는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아예 불신하기 때문에 부인할 목적으로 의심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그런 상황이나 사건이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알고 싶어 의심한다.

의심이 없으면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 하는 의심(질문)은 우리를 더 성장하게 하지만 하나님을 부인하기 위해 하는 의심(질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파멸로 몰아간다.

광야에서 불평 속에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의심했던 사람들로서 매일 맛나를 공급 받았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하나님께로 더 깊이 나아가게 하는 의심이 있고 불평과 원망과 멸망으로 이끄는 의심이 있다.

만약 내가 아무런 의심이나 질문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참으로 믿음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맹신하고 맹종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런 진보나 성장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2015년의 마지막 몇 일을 남기고 있는 지금 나에게는 어떤 질문과 의심이 있는가? 아니면 아무런 질문이나 의심없이 만족하고 있는가?

정말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 겉으로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다고 해도 주님께 깊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뿌리 내리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겉만 꾸미기에 바쁘지 않은가? 관계의 변화와 나의 태도의 변화가 있는가? 공동체에는 변화가 있는가? 우리에게 격려가 있고 도전이 있는가? 나는 정말 기쁘게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체면이나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예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