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3. Wednesday, Genesis 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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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23. Wednesday

Genesis 36:35
And when Husham died, Hadad the son of Bedad, who attacked Midian in the field of Moab, reigned in his place. And the name of his city was Avith.

"조급하게"라는 이름의 뜻을 갖고 있던 후삼(Husham = hastily) 왕이 죽었다. 그리고 브닷(Bedad)의 아들 하닷(Hadad)이 그의 뒤를 이어 다스리게 되고 모압 땅에 있던 미디안을 공격한다.

조급하게 몰아가는 삶에는 뭔가 생각하는 것도 있고 많은 것을 행하기도 하지만 늘 여유가 없고 쫓기며 불안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몰아가던 후삼 왕이 죽고 난 뒤에는 뭔가 좀 느긋하고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까?

아마도 후삼이 다스리던 때에는 다른 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급하게 살던 그때에는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기에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삼이 죽고 하닷이 왕이 되면서 무딘 칼을 날카롭게 갈 정도로 자신을 돌아보고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 아닐까?

그래서 후삼이 죽고 난 뒤 위대하고 강력한 하닷(הדד = mighty)이 왕으로 세워지고 미디안을 공격할 정도로 강해진 것이 아닐까?

"하닷(hadad, הדד =mighty, 위대한)"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하닷(chadad, חדד = to be sharpen or fierce, or severe, 날카롭게 하다)"이라는 말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두 단어는 다른 단어이다.)

이 두 단어는 전혀 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흥미롭다.

왜냐하면 무기나 자기 자신을 날카롭게 갈고 평소에 잘 준비하지 않으면 강한 전사로 세워질 수도 없고 전쟁에서 이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물 속에서 잘 깍여진 매끄러운 물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정확하게 명중시킨 다윗은 그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날카롭게 준비한 사람이었다.

사울의 갑옷을 벗고 물매를 들고 나가는 다윗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나 골리앗은 다윗이 어리석은 결정을 한 바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 짧은 시간에 골리앗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에 대한 전략을 세웠고, 물매를 사용하는 기술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자 그 끓어 오르는 감정 때문에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개 죽음 당하려고 감정으로 뛰어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형들의 비웃음을 뒤로 한채 사울 왕의 갑옷과 무기도 사양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전투에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물매를 갖고 나아간다.

만약 내가 평소에 하나님께 묻고 들으며 그 분께 민감하게 살지 않았다면 그 순간 그런 어리석어 보이는 믿음의 결정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내가 평소에 물매를 연습하고 그 기술을 날카롭게 연마하지 않는다면 싸움에 나가서 개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

다윗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날카롭게 준비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주파수가 잘 맞아 있었고 평소에 그의 물매로 골리앗과는 비교도 안되게 작은 목표물인 곰이나 사자, 늑대를 상대로 예리하게 과녁을 날리는 연습을 충분히 했다.

골리앗이 엄청나게 큰 덩치를 갖고 있었기에 위협적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다윗에게는 큰 과녁을 제공했기에 곰이나 사자의 이마를 맞추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어떤 때는 문제(도전)가 크면 클수록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물맷돌을 날려 맞추기에는 더 쉬울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역설이며 믿음의 신비이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문제(도전)가 작으면 결국에는 믿음없이 나의 상식이나 나의 능력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찾는다.

하닷의 아버지가 브닷(בּדד = separation, 분리)이다. 이러한 분리로부터 예리한 용사인 하닷이 태어났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분리가 없으면 예리한 분별력과 날카로운 날을 가질 수 없고 그냥 두리뭉실하게 별 감각없이 세상 속에서 타협하거나 항복하고 노예처럼 살아갈 것이다.

다윗은 이미 그의 가족들로부터 거절 당한 채 광야로 가서 양을 치며 충분히 분리된 삶을 살며 자신을 날카롭게 준비했다. (시 27:10)

모세도 40년을 분리된 광야에서 자신을 준비했고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자신을 분리하며 준비했다.

이러한 분리가 없이 시작된 하루는 이 세상 속에서 분별없이 두리뭉실 하게 타협하고 넘어 가거나 준비없이 조급함에 몰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제대로 분리하며 살아가는가? 저녁이 되면 하루를 마무리 하고 쉼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아침이 와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 어제(yesterday)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시작이란 반드시 끝을 동반한다. 즉 분명한 끝이 없으면 새로운 시작이란 있을 수 없고 끝나지 않은 여정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어제와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분리란 결코 아름다와 보이지 않지만 끊고 맺는 분리가 없으면 새로운 시작과 창조적인 삶(creative life)이 있을 수 없고 반복적인 삶(repetitive life)만 이어질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 세우고 건설한 것이라고 해도 사람이 만든 것은 결국 순간이다. 즉 하닷처럼 아무리 강력하고 날카로운 무기와 전략으로 정복해서 세운 도시 "아윗(עיּות = ruin)"이라고 해도 결국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확한 시간에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분리하셔서 연약한 어린 아이로 이 땅에 오셨고, 어린 양으로 침묵 가운데 모든 것을 벗기우시고 무참히 처형 당하신 예수님이 세운 나라는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무서운 기세로 지금도 전진하고 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매일 매일 나를 분리해서 그 하나님의 광야에서 나를 갈고 닦지 않는다면 이 세상 수준의 골리앗과 같은 거장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만 신뢰하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믿음의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도시를 세우기 전에 먼저 내 안에 광야 만드는 것을 배워야 한다. 기술과 방법을 익히기 전에 먼저 관계 세우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아침을 맞기 전에 먼저 밤에 자고 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서 분리와 끝이 없는 노예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