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6. Wednesday, Genesis 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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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6. Wednesday

Genesis 36:29
These were the chiefs of the Horites: Chief Lotan, Chief Shobal, Chief Zibeon, Chief Anah,

족장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알루프(אלּוּף =familiar, gentle, a friend, a bullock, captain, chief)"로서 "친근한" "부드러운" "친구" "길들여진 소"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지도자나 족장은 영화 "캡틴 아메리카"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람보"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다른 사람들과 유난히 다르고 특별히 신체적으로 강인해야 한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족장들을 보면 정반대이다.

두려움 때문에 자기 아내를 팔아 먹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말할 것도 없고 야비한 숫법으로 장자권을 취하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취한 야곱은 더더욱 족장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되먹지 못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족장들은 자기들이 족장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지도자의 기술을 단련함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건이나 자격과는 전혀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이 택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아이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지도자가 될 것이며 나이 많은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여기 더포지(the Forge)라는 작은 공동체의 리더로 있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섭리와 계획 때문이란 말일까?

나는 내가 이러한 공동체의 리더가 되기 위해 돈을 써 가며 로비를 하거나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청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주님이 주신대로 "아둘람 굴"을 찾아 온 사람들을 받아주고 섬기는 것에 대한 마음을 갖고 신혼 때부터 우리 집을 찾아 온 사람들을 받아 주기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도자나 족장이란 뭔가 다른 사람들과 유난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히브리어 단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친근하고 부드럽고 친구 같고 잘 길들여진 소처럼 거리감이나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세상에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 같은 기질이 다분이 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고 사람들을 알아가고 그들을 배우는데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알 수 있도록 나를 드러내야 한다. (어제 주변에 있는 두 사람과 삶에 있는 깊은 갈등과 도전들을 듣고 나누었다.)

물론 예수님은 인간이 되어 사람들 속에서 33년을 사셨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 속에 묻혀 그들과 함께 평범함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며 그의 뜻을 알고 이루기 위해 새벽 미명에 일어나 홀로된 곳에 가셔서 당신을 준비하는 삶을 사셨다.

즉 예수님은 지도자가 되기 전에 한 인간이 되어 사람들 속에 오셔서 그들 중에 함께 사셨지만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을 잊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떠나 하나님과 홀로 하는 시간을 언제나 가지셨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홀로 대하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동화되어 그들 수준에서 경쟁하며 눈치보고 살든지, 아니면 그들과 전혀 다른 폭군이나 독재자가 되어 군림하며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홀로하는 시간을 갖고 사는 사람은 모세처럼 상하고 깨어진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자신의 영생을 포기하면서까지 백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말하는 지도자에 대한 모습과 하나님 나라에서 말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너무나 다르다.
 
족장이라는 말의 히브리어의 뿌리가 되는 동사는 "알라프(אלף =to associate with, to learn, to teach)"로서 "관계를 형성하다" "배우다" "가르치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족장이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족장이나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이든지 실제적인 기술이든지 먼저 배워야 그 배운 것으로부터 남을 가르칠 수 있다.

앵무새처럼 무조건 배운 것만을 반복한다면 개성이 없기도 하겠지만 자기만의 창의성이 없고 남의 것을 베끼고 그것을 전수하기에 분주하며 치열한 경쟁으로 피곤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시간을 보내지 않고 배울 수 있을까? 마음을 쓰지 않고 배울 수 있을까? 배우려는 태도가 없으면 남을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예수님은 30년을 배우셨다. 그리고 3년 동안 삶을 통해 친히 가르치셨다. 그랬기 때문에 그 뿌리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뿌리는 너무나 얕다. 그래서 약간의 핍박에도 나무가 흔드리고 뿌리채 뽑히는 경우도 있다.

뭔가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시간을 내고 배워야 한다. 족장이나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듣는 귀를 가져야 하고 배우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폭군이나 독재자는 될 수 있겠지만 참된 족장이나 지도자는 될 수 없다.

나는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있는가? 어쩌면 나는 배우기를 싫어 하고 가르치기만 좋아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가르칠 수 없고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한걸음 물러 서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지체들에 대한 신뢰없이는 불가능한 여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한 발자욱 물러난 나의 부재 가운데서 형제 자매들이 믿음으로 자라는 것을 본다.

믿음이란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존재를 신뢰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도 된다. 하지만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신뢰하려면 비로소 믿음이 요청된다.

하나님이 마리아를 신뢰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낸 것이 바로 그 믿음이다.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을 것 같은 상황과 감정에 사로잡혀 낙태라도 해 버렸다면 하나님의 모든 우주적인 계획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신뢰를 마리아에게 두시고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마리아의 태에 보내셨다. 믿음으로 아들의 죽음과 전 우주적인 실패의 위험을 선택하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믿음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살고 있는 지도자인가? 아니면 온갖 머리를 굴리면서 안전한 방법으로 살고 있는 지도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