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5. Tuesday, Genesis 36:28

  • Print

 

2015. 12. 15. Tuesday

Genesis 36:28
These were the sons of Dishan: Uz and Aran.

세일의 다섯 번째 아들이 디손(Dishon)이고 일곱 번째 아들이 디산(Dishan)이다. 그리고 세일의 네 번째 아들 아나의 아들이 디손(Dishon)이다.

이러한 이름들 디손과 디산은 "뛰는 자" "산양"이라는 뜻이고 그 뿌리 동사가 두샤( דּוּשׁ), 도샤( דּושׁ), 디샤( דּישׁ)이며 "짓밟다" "깨뜨리다"라는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디산, 디손이라는 이름이 그 당시에 유행이었을까?

이번에 영국에서 홍수 기간 중에 한 산모가 극적으로 병원에 도착했고 2분 뒤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노아(Noah)라고 지었다. 왜냐하면 노아는 홍수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아이가 홍수 전에 태어났더라면 방주를 미리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홍수 중에 태어났기에 방주를 만들기에는 너무 늦었다.)


호리 자손의 첫 조상인 세일은 산악 지대인 세일 산지(에돔 땅)에 정착을 한다. 그들은 그 산악 지대에서 산양처럼 뛰며 달리는 존재로 살고 싶은 바램들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아들들의 이름을 디산, 디손이라고 지은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서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환경에 도전하고 응전해서 새로운 것을 찾고 만들어 간다. 그래서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는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ce)의 역사이다"고 했다. 즉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강을 끼고 있는데, 그것은 그 땅이 단지 비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서 문명을 이룬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강의 범람을 막고 이기기 위해 응전함으로써 인류 문명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세일 산지에 정착을 하게 된 이들도 산지라는 도전에 직면했을 때 평지를 찾아 떠나지 않고 이러한 도전에 응전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기반과 태도를 발전시켰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밖에서 오는 장애(obstacles)나 적들에 대해서는 곧잘 응전(respond)하지만 밖에서 오는 유혹이나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탐욕에는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밖에 있는 골리앗 같은 원수보다 내 안에 조용히 숨어있는 나 자신(self)이 더 무서운 원수이다. 다윗은 자기 앞에서 큰 소리 치고 있던 골리앗은 한 방에 넘어뜨렸지만 자기 안에 조용히 숨어 있던 정욕 앞에는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나는 나(self)라는 존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계속해서 배워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밖에서의 승리 후에 안으로부터 무참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서로마 제국은 북방에서 침입한 서고트족 때문에 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그 내부에서부터 타락하고 곪아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부터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이처럼 내가 나를 제대로 다스리지(self-control, self-discipline) 않는다면 그곳이 산지든지 평지든지 외부의 적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스스로 자신을 망치게 될 것이다. 롯은 평지에서 소돔성 사람들에게 당할 뻔 했지만 천사들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망갔던 산지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기 딸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창 19:9)
 
Genesis 19:9
And they said, "Stand back!" Then they said, "This one came in to stay here, and he keeps acting as a judge; now we will deal worse with you than with them." So they pressed hard against the man Lot, and came near to break down the door.


세일의 막내 아들 디손이 세일 산지에서 낳은 두 아들의 이름이 우스(עוּץ = consultation; 상담, wooded; 나무로 뒤덮인 숲)와 아란(ארן = stridulous, joyous; 기쁨으로 소리내는, 기쁨의)이다. 아마 그들의 아버지 디산은 현재 그가 살고 있는 황량하고 붉은 산악이 아니라 초록의 나무로 뒤덮인 숲을 꿈꾼 것이 아닐까? 그리고 기쁨과 웃음이 가득한 낙원을 꿈꾼 것이 아닐까?

그런데 결국에는 세일의 후손, 호리 족속은 그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땅은 그대로 있었다.

성경은 욥을 우스 땅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미루어 볼 때 디손의 아들 우스는 나름대로 그 땅을 가꾸고  자신의 이름을 그 땅에 남길 만큼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우스 땅이 같은 곳이라면) 그 땅에서 자란 욥은 디손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같은 땅에서 이렇게 전혀 다른 사람이 자랄 수 있을까?

Job 1:1
There was a man in the land of Uz, whose name was Job; and that man was blameless and upright, and one who feared God and shunned evil.

아벨과 카인은 같은 (아담과 하와라는) 땅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달랐고 내면의 토양이 달랐다.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고 해도 매일 매일 돌보고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하게 된다. 나의 내면의 토양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매일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듣고 순종함으로 가꾸지 않으면 황폐하게 되고 잡초만 무성케 될 것이다.

카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경고를 들었지만 무시하고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불러내어 쳐 죽이고 말았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으로부터 경고를 들었지만 마음이 이미 굳어져 있었고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긴다. (창 4:7)

Genesis 4:7
"If you do well, will you not be accepted? And if you do not do well, sin lies at the door. And its desire is for you, but you should rule over it."

아간도 게하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이미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에게 거짓말 하고 베드로를 속임으로 저주를 자청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와 생명을 주는 생명 나무는 에덴 동산 중앙의 같은 토양에서 자랐다. 같은 땅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자란다고 해도 진리와 생명이신 하나님께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생명나무가 자랄 수 없고, 선과 악은 분별하겠지만 생명과 죽음을 분별하지 못한 채 무성한 지식의 나무 숲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