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3. Sunday, Genesis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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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3. Sunday

Genesis 36:26
These were the sons of Dishon: Hemdan, Eshban, Ithran, and Cheran.

세일의 다섯 번째 아들 디손(דּישׁן)의 족보이다.

디손의 아들들의 이름은 헴단(חמדּן = pleasant, 기쁨), 에스반(אשּׁבּן = vigorous, 왕성한), 이드람(יתרן = excellent, 뛰어난), 그란(כּרן = lyre, 현악기) 등으로 기쁨이 있고 왕성하고 뛰어나며 아름다운 음악이 그 이름들 안에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이렇게 멋진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이들을 그 이름처럼 양육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는 주변 환경과 부모의 영향이 참으로 크다. 만약 부모가 너무 바빠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거나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 가운데 버려진 채 자란다면 그들은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그 이름처럼 자라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름만 지어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들이고 땀과 눈물과 사랑을 쏟아야 한다. 때로는 가슴이 찢어지고 마음이 깨어지는 아픔도 있고 정반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도 있다.


학생을 가르치고 제자를 양육한다는 것과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학생을 가르칠 때는 정보의 전달과 사회적 규범만 전달하면 되고 제자를 양육한다는 것은 기술과 함께 그 스승의 인격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스승은 그 훈련과정이 끝날 때까지만 학생과 제자를 책임지면 된다.

하지만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마음과 삶을 통해 사랑과 신뢰가 전달되어야 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선생이 되어 다수의 학생이나 제자를 양육하고 그들의 인생에 깊이 간여하지 하지 않으며 책임지지 않는 현명한(?) 길을 택한다. 하지만 부모란 그들의 신체적 양육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책임과 관심을 갖고 듣고 나누고 대화하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희생하며 살아간다.

나는 더포지 공동체 여정에서 과연 아비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선생으로 살고 있는가? (고전 4:15)

1 Corinthians 4:15
For though you might have ten thousand instructors in Christ, yet you do not have many fathers; for in Christ Jesus I have begotten you through the gospel.

내가 제대로 아비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단지 선생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서로에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본도 아니다.


네 명의 아들을 두었던 아버지 디손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디손(דּישׁן = leaper, 뛰는 자)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뿌리 동사는 두쉬(ׁ דּוּשׁ), 도쉬(ׁ דּושׁ), 디쉬( דּישׁ)라는 단어로 "짓밟다(to trample, to thresh)" "찢다(to tear)" "부수다(to break)"는 뜻이 있다.

아이들이 점프하면서 뛰어 노는 놀이기구 가운데 "트램플링(trampling)"이라는 것이 있다. 트램플링을 제대로 하려면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것은 물론 밟고 점프를 해야 한다. 제대로 밟을 것이 없으면 제대로 점프할 수 없다. 즉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진흙탕이나 모래 위에서는 제대로 점프할 수 없다.

이처럼 내가 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사람을 짓밟거나 찢고 부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내가 짓밟히고 찢어지고 부수어지게 될 때 다른 사람이 뛰어나게 되고 높아지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누군가를 박차고 점프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점프하도록 기꺼이 짓밟히는 자가 될 것인가? 누군가가 나를 다리(bridge)처럼 짓밟고 지금 있는 곳에서 다음 단계로 건너갈 수 있다면 기꺼이 나를 내어줄 것이다. 하지만 엉뚱한 곳으로 점프하고 엉뚱한 곳으로 건너가려고 한다면 나를 내어 주어서는 안된다.


스승과 제자는 "경쟁 관계(competitive relationship)"에 있지만 아비와 자녀는 "응원 관계(complimentary relationship)"에 있다. 즉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면 스승은 위협을 느끼지만 아비는 아들이 자기보다 뛰어나기를 바라고 기뻐하며 기꺼이 자기 자리까지 내어준다.  


이드란(יתרן = excellent)은 "뛰어난"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뿌리 동사인 "야타르(יתר = to jut over, to excel, to remain, to be left, to preserve, to be bound, to rest)"를 보면 그 뜻이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뛰어나다" "나아가다"는 뜻이 있는 반면에 "뒤에 남다" "남겨지다" "보관하다" "묶여지다" "쉬다"는 뜻도 있다. 이것은 거의 서로 반대가 되는 뜻이다. 하지만 뛰어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뒤에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만약 뒤에 남아 있는 것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결국은 소진(burn-out)되어 추락하고 말 것이다.


자동차의 엔진은 닫혀진 공간 안에서 휘발유나 경유가 폭발함으로써 동력이 발생하고 무거운 자동차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휘발유나 경유를 드럼통 채 땅바닥에 갖다 붓고 불을 붙인다면 화염과 연기를 발생하며 장시간 타오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동력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불이 주변에 옮겨 붙어서 산이나 마을을 태움으로써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가솔린 엔진은 순발력은 좋지만 연료 효율이 디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힘이 디젤보다 약하다. 가솔린은 40°C에서 불이 붙고 디젤은 65°C에서 불이 붙는다. 그래서 디젤 엔진이 화재에 있어서는 더 안전하다. 그리고 가솔린 엔진은 연료와 공기를 혼합해서 10배로 압축하는 반면 디젤 엔진은 공기를 20배로 압축한 뒤 디젤을 분사해서 자연 점화가 일어나게 한다.

이처럼 가솔린 엔진과 디젤 엔진은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차이는 가솔린 엔진에는 점화 플러그가 있어서 불꽃을 외부에서 공급되는 전원을 통해 일으키고, 디젤 엔진은 점화 플러그 없이 압력 때문에 기화된 디젤이 분사되면 스스로 폭발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가솔린 엔진은 언제나 외부의 전기 점화 불꽃에 의존되어 있지만 디젤 엔진은 기화된 디젤이 외부의 전기 불꽃에 의존되지 않고 스스로의 압력에 의해 점화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엔진을 점화시키는데 있어서 가솔린 엔진은 수동적이고 디젤 엔진은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의 아둘람 굴에 모였던 사람들은 속에 열불(fire)이 가득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끓어 오르는 불꽃이 아둘람 안에서 통제(?)되고 조절됨으로써 이 땅에 새로운 왕국을 시작하는 기초와 동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1 Samuel 22:2
And everyone who was in distress, everyone who was in debt, and everyone who was discontented gathered to him. So he became captain over them. And there were about four hundred men with him.

하지만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속에 열불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그때마다 쏟아냄으로써 스스로 광야에서 소진되고 말았다.

사울이 모집했던 일류들은 겉으로는 휘황찬란한 빛을 갖고 있었으나 그 안에 불이 없었기 때문에 골리앗의 위협에 도망치고 말았다.


열정없이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끔찍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잘 통제도 안되고 잘 조절되지도 않지만 열정을 갖고 적극적인 태도로 "스스로" 아둘람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만약 이들 안에 있는 그 불이 제대로 통제되고 조절된다면 엄청난 동력을 발생할 뿐 아니라 앞으로 전진하며 나아가게 될 것이다.

통제되고 조절되지 않은 불은 우리를 여기저기 쏘아 다니게 하며 소진시키고 재만 남은 과거로 가게 하지만 통제되고 조절된 불은 한 곳에서 우리를 새롭고(refine)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